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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리스 Iris Jan 18. 2021

본 게임을 시작하지. 카타르항공 면접 후기 3

이 구역의 주접 퀸은 나야

두 면접관 거의 동시에 손을 들고 다음 면접자를 기다린다. 
아까는 쫓겨나다시피 뒷걸음질 치던 그녀가 양손에 쥐어진 초콜릿 중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어린아이처럼 함부로 결정하기 힘든 선택지 앞에 던져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날 다시 뒤로 돌려보냈던 면접관 ‘리비(가명)’는 간발의 차이로 유럽 면접관인 ‘소냐(가명)’ 보다 늦게 손을 들었다. 자신의 잘못된 안내 이후 양심에 털 난 사람처럼 미안함의 오오라를 내뿜던 호텔 직원은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나를 소냐에게 보내려는 눈치였다. 사실 소냐가 손을 든 속도 로보나 호텔 직원의 의도로 보나 나는 소냐 면접관에게 가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나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다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었을까? 리비와 의외로 케미가 터질 것 같다는 직감과 함께, 으레 모든 별난 성격의 소유자가 그러하듯 소냐가 아닌 나를 다시 돌려보냈던 리비에게 배정되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요지부동인 나를 향해 마침 리비가 한번 더 내게 손짓을 했고 나는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잘됐다 싶은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비록 아까는 전략상 일보 후퇴(?) 였지만 이번엔 나의 자신감을 보이리라. 당당하게 (보이려 애쓰며) 리비 앞에 섰다. 호텔 직원의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물음표 백만 개가 내 뒤에 잔뜩 띄워졌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렇게 다시 리비 면접관에게 향하는 짧은 몇 걸음 동안 처음으로 그녀와의 아이컨택이 이루어졌다.


그래 바로 이거지. 이게 나라고. 
저를 봐주세요 면접관님! 아까 그것은 저의 실수가 아니랍니다.


그녀는 미세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편)

나를 긍정적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편).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 마음이 편해진 나는 위풍당당 런웨이 모델에 빙의해 어디서 주워들은 캣워크를 시전 중이었고 한껏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내미는 그녀에게 살포시 나도 손을 내밀어......



응? 손을.... 아니 이력서를......

아니 손을.... 어...  (100% 실화입니다)

하 거침없이 이불 킥 감이다 이건.


그렇다. 나는 이력서를 달라고 손을 내미는 그녀의 손 위로 무도회에 온 공주님처럼 살포시, 이력서가 아닌 내 손을 주며 지극히 일방적인 악수를 한 것이다. 영어권 국가에서 학교를 다녔던 나는 어느샌가 처음 본 사람과는 악수를 하며 인사하는 습관을 형성했던 모양이다. (대환장)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데 그땐 아찔한 줄도 몰랐다. 진짜 아찔한 인간이다. 그저 좋다고 반갑다고 덕선이처럼 손잡고 흔들어 대며 인사했다. 


단호했지만 당황한 그녀.

리비는 내 손을 거부하기 위해 자꾸 손을 빼려고 하고 그걸 또 나는 계속 잡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결국 이력서랑 사진이랑 전부 다 떨궜다. 


파일명_이 구역의 주접 퀸


한참 나랑 실랑이하던 리비 왈,



그만. 악수는 하지 않아. 이력서나 이리 줘.


아까는 '망했구나.' 이 네 글자였다면 이번엔 찐이다. 다섯 글자다. 


진. 짜. 망. 했. 다.


자, 좋은 경험 했다 치고 이것을 바탕으로 귀국하고 광명 찾아 본격 승준생의 길을 걷는 거야. 

심지어 내가 떨군 이력서와 사진들을 주섬주섬 주우려 하자, 이내 못 미더웠는지 본인이 직접 흩어진 서류를 주워 정리하는 리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

웃음기 싹 빼고 본 게임을 시작하지

대화는 짧고 굵었다.


리비: 너 이거 몇 번째 지원이야.

악수의 충격에서 못 빠져나온 1인: 첫 지원이야.

리비: 정말이야?

의아한 1인: (지금 이 모든 걸 보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며) 정말이야!

리비: 여기 왜 왔어?

이 구역의 주접 킹: 이 항공사에 지원...

리비: (말 끊고) 아니 뭐가 널 여기로 오게 만들었느냐고?

의도 파악 못한 지원자: 그게 그러니까 (준비한 답변 푸는 중)

리비: (답답해서 대놓고 묻는 면접관) 저번 한국 오픈데이 왜 안 왔어?

그제야 의도 파악한 1인: 아 그땐 아직 대학원생이었어서 지원 못했어. 

리비: 그럼 외국에서 학교 다녔을 때 생활 어땠어? 

나: -답변 중-

리비: -답변 들으며 한 손 옆 종이에 갖다 대는 중-

나: -계속 열심 열심 답변 중-


좋아. 넌 내일 9시까지 늦지 않고 오는 거야. 알겠지?



네? 정말요? 그 모든 주접에도 괜찮으시겠어요...? 


진짜 순간 눈물 날 뻔했다. 믿기지 않았다. 앞의 그 모든 해프닝이 있고도 종이를 받을 줄은. 오히려 이미 마음을 놔서 그런가 편하게, 그리고 정말 진부한 표현일 수 있지만 나 답게 답변을 했던 것 같다. 리비는 이미 내 답변을 들으면서 인비테이션 레터에 쓱쓱 어떤 표시를 하고 내 이름을 써내려 갔고 아직 사태 파악 덜 하고 열심히 답변에만 집중하던 내게 처음으로 미소를 보여주었다.



Really? Thank you! Thank you so much!
I'll see you tomorrow!



렉 걸린 구간처럼 저 말만 무한 반복했다 (기쁘면 영어가 짧아지는 편).


벅찬 마음에 또 습관처럼 허그할 뻔했는데 그렇게 하면 이번엔 진짜로 기겁하고 시큐리티 부를 것 같았다. 간신히 참고 종이를 소중히 들고 나오는데 (보노보노의 조개를 아는가) 


어찌나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좋던지. 밖에선 오전 내내 인고의 시간을 함께하며 벌써 친구가 된 대만 지원자들이 멀리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종이를 보고는 


"I knew it! Congratulations!"


하면서 안아주는데 흡사 전우애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은? 하고 물어보니 빈 두 손을 들어 보이더라. 순간 내가 미안할 일은 아니었지만 맘이 짠하고 속상했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함께 붙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우면서 기다려준 친구들이 참 많이 고마웠다. 흥분을 뒤로하고 냉수 먹고 속 차린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챙겨 먹고 면접장 주변 타이베이 거리도 조금 둘러본 뒤 다시 숙소로 들어왔다. 적당히 2차 면접 준비를 마무리하고 그날은 일찍 잠에 들었다.

 

#다음날 어세스먼트 데이

 

이 날도 늦지 않게 서둘러 대기장으로 향했다. 1차 cv drop 때 보다 줄긴 했지만 여전히 꽤 많은 숫자의 처음 보는 지원자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후에 듣기로는 첫날 약 2500명이 넘는 지원자가 왔었다고 한다. 내가 빨리 온 편이었는지 다행히 원하는 자리에 앉아 대기하게 되었고 그런 내게 한 지원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여기 앉아도 될까?

대만인과 한국인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당시의 오픈데이의 특성상 좀처럼 만나 보기 힘든 인도계(처럼 보이는) 지원자였다. 


그럼! 앉아도 되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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