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과는 매우 어울리지 않지만 나의 MBTI는 ESTJ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나와 같은 유형은 16가지 MBTI 유형 중 가장 계획적으로 사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성격유형검사는 지금까지 수년에 걸쳐 4번 정도 해 보았는데, ESTJ, ESFJ, ENTJ, ENFJ가 골고루 나왔다. 마지막에 한 검사는 인터넷에서 하는 약식 검사가 아닌 실제 기관을 통해 정식으로 검사해 본 것이라 신뢰도가 높은 편이고, 이 검사에서 나는 ESTJ라는 유형을 진단받았다. ESTJ는 극강의 효율성을 추구하고 시간 낭비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가장 효율적으로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 계획을 하는 것이다. 인생을 먼 곳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바라본 뒤 내게 올 그 모든 것들을 앞뒤 살펴보고 배치한다. 그래서 이런 유형은 ‘엄격한 관리자’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학창 시절부터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때는 ‘P’의 성향이 더 컸던 것 같다. 지금처럼 계획적으로 철저하게 살았다면 공부를 그때보다는 훨씬 잘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대학교 2학년쯤인가, 무언가에 위기감을 느낀 이후로 삶을 조금 더 계획적으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취업 과정을 겪으면서 계획적으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잘 알고 철저하게 취업을 한 사람들을 보면서 좀 더 계획적이지 못했던 나에 대해서 반성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이후로 큰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또 계획하고 실행해왔다. 작은 성공을 계획해내고 이루어내면서 자기 확신의 삶을 살아왔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나누고 가능한 것 위주로 도전하는 삶이 계속돼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이렇게 계획적인 삶을 사는 것이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강박적으로 살아가는 내 자신이 안쓰럽다고 생각한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 그게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무한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삶. 유연하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을 정해놓고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삶. 이런 것들이 점점 나를 옥죄여 오는 것 같았다. 실제로 나의 스트레스의 원인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데서 오는 불안함과 위기감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최대한 계획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네가?’라는 반응이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예를 들면 ‘영어 점수 올리기’ 같은 것들은 계획적으로 하지만 ‘휴일에 할 일 정하기’ 같은 것들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도 최대한 많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요즘 유행하는 밈인 ‘오히려 좋아’, ‘가보자고’ 같은 말 들을 인생의 명언쯤으로 여기고 닥치는 일들을 그에 맞게 처리해보려고 한다.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것을 계획(생각해보니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라는 계획을 또 짜고 있었다)하게 된 계기는, 계획을 짜고 살고 있는 지금 보다 계획 없이 살았던 때가 더 행복했고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부터 누가 뭐라 하던 내가 좋아하는 일을 그냥 밀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결론적으로 지금 내가 갖게 된 직업도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계획 없이 하다 보니 한 가지의 교집합이 생겼고, 결국은 그 분야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냥 별생각 없이 한 내 선택들이 결국엔 나의 취향이 되고, 나의 적성이 되고, 나의 장점이 되었다.
때로는 잘못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주기도 한다.
어느 방송사 피디의 글의 제목인데, 그 글을 읽고 내 마음에 쏙 들어왔던 적이 있다. 그 피디는 우연한 계기로 피디가 되었고, 우연한 계기로 어떠한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는데 그 우연한 선택들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고 결국엔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한 번에 몇 년간 만들어진 내 자아를 바꾸긴 어렵겠지만, 작은 부분에서도 이러한 성향을 조금이나마 바꿔보려고 한다. 그럼 언젠가는 내가 탄, 잘 탔을지 잘 못 탔는지는 모를 기차가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날 데려다줄 것이니 말이다.
ps. 이 정도는 거창하고 원대한 계획은 아니고, 다짐쯤이니 괜찮겠지… 하며
ps2. 대체 이 글엔 ‘계획’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왔을까요..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