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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 Jul 27. 2023

나의 무쓸모를 깨닫게 된다는 건 - 1편

정책학과 출신 찐문과생, 삼성 개발자되다.


 * 우연히 들어가본 노션에, 한창 자바 기초를 공부하던 2022년 6월 22일의 필자가 ‘나의 무쓸모를 깨닫는다는 것’이라는 슬픈 제목으로 글을 적어놓은 것을 발견해 그 이후부터의 행적을 정리할 겸 해서 글을 적고 업로드합니다. ‘기억보단 기록을’이라는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제목처럼, 그 시절 어느 순간 문득 들었거나, 긴 시간 씹고 씹었던 감정을 내 공간에 남겨두고 싶어 쓰던 미완이던 글을 마무리해 봅니다. 아직도 쓸모가 많진 않지만, 처음 본인의 무쓸모를 직시했던 그 순간의 막막했던 감정을 다시는 잊지 않기 위한 기록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이르기까지 큰 걱정 없이 자랐다. 남들이 괜찮다고 하는 것은 한 번씩 해봤고, 하면 안 좋다고 하는 것은 열심히 피했다. 초, 중학생 때에는 육상과 축구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한 고등학교는 축제가 굉장히 많았고 야자만 가면 됐다. 그 이외의 시간은 족구나 축구를 하면서 보냈다. 막연히 경영학과에 간 뒤에 와플을 파는 카페의 사장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이유는 모르겠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고 어떻게 대학은 갔다.  



     대학에 진학해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건 내게 큰 행운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공직이나 법조인으로서의 진로를 꿈꾸는 학과에서 내게도 미래는 멀지만 분명해 보이는 듯했다. 화장실에 들르고 싶으면서 남들이 다 그곳으로 향하기에 콘서트장 출구로 향하는 인파에 몸을 맡긴 한 관객처럼, 막연히 ‘나도 언젠가 저곳으로 가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것도 없으면서 쉬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에 22살엔 일본으로 1년간 유학도 다녀왔다. 한국에 돌아올 때가 되니 선배, 동기들이 하나하나 로스쿨에 진학하거나 행정고시에 합격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때까지 부러움이나 초조함과 같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냥 나도 어떻게든 (잘)되겠지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품은 채, 똑같은 삶을 살았다. 고민도 걱정도 없이.


    

평화로운 강릉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간단한 이치를 깨달은 건 25살 막바지에 이르러서였다. 단과대 부학생회장을 1년 하고 학생회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해결하지 못한 미래의 문제들이 한꺼번에 다가왔다. 군대 문제는 어떻게 할 건지,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준비된 게 있는지(준비된 게 없어서 문제가 됨).



  그렇게 갑자기 조바심을 느끼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노력대비 과분한 결과를 얻어 온 수많은 과정 속에서 형성된 오만함을 깨부수어버린, 내 실력에 대한 객관적 자각이다. 대학원 입시 시험, 어학 시험, 어느 하나에서도 막연히 바라오던 기대치와 실제 점수의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둘째로 내가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내 진로나 미래가, 정말 내가 바라는 것인가에 라는 문제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대답을 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큰 역할을 했다. 법조인으로 사는 것이 내 적성에 맞고 완전히 만족할 수 있는 삶인지에 대해 고민한 시기이기도 했다.(다행스럽게도 학생회를 하면서 만나게 된 여러 기회들 덕분에 이런 고민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때문에 학교생활에 부족함을 느낀다는 후배들에게 학생회를 한번 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셋째로 그렇게 내 수준에 대한 모든 기준치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놓고 보니 내가 지금 사회에 던져졌을 때 쓸모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에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자신이 쓸모없다는 것을, 그것도 어쩌면 늦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시기에 깨닫게 된다는 것. 이것만큼 마음 아프고 불안한 일을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이런 조바심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 우선 군대를 가야 했다. 덜 쓸모없는 사람이 돼야 했다. 뭘 익히거나 진행하더라도 병역 문제 때문에 가로막히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더 이상 군대를 미룰 방법이 없었다(제도적인 대책도, 집에 둘러댈 마땅한 명분도 없었다). 그나마 할 줄 아는 일본어를 이용해 해군 어학병으로 입대를 했다. 보직의 특수성 때문에 갑판병 임무도 함께 수행할 수 있다는 내용을 확인했지만 어느 정도는 어학병 신분을 참작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감수하기로 했다. 배를 6개월 간 탔고, 그 이후에는 해군본부 가장 높은 곳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출동이 잦고 그 기간이 긴 배를 탄 탓에 함정생활을 할 때에는 건강만 챙겨도 본전이라는 애달픈 자기 위로로 6개월을 보냈지만, 배를 내린 이후부터는 다시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마음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 2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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