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경자년(庚子年)이 저물고 있다. 연말이면 한 해를 돌아보며 사회의 변화와 경제, 정치 등 분야를 짚어보곤 했지만 올해는 그러한 몸짓들이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을 삼켜버린 코로나 19로 인해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게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올해를 돌아보면 개인적으로 1월 정기 인사발령으로 **지점으로 부임했다. 1월 초순만 해도 별일 없는 듯 보였는데 1월 하순부터 전염병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급기야 직장의 모든 것을 정지시켰다. 지점 간 회의, 지역본부, 본부 부서와의 모든 회의를 화상으로 진행했다. 직장인들이 즐기는 점심 식사도 간간이 식당을 찾다가 사람들이 적은 시간대를 골라 식사를 하게 되더니 결국에는 배달 도시락으로 대체됐다. 팀장과 팀원들은 1/3씩 재택근무에 들어갔고 관리자인 나만 매일 출근 중이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풍경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사회성을 봉쇄하는 게 가능할까. 국내는 그나마 'K 방역'이라는 브랜드로 포장되어 방역조치가 각광을 받았지만 아메리카와 유럽의 뉴스를 보면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부의 통제가 먹히지 않는 모습이 그 답을 제공한다. 코로나 블루라는 새로운 증상도 생겨나고 있어 정신적인 관리도 매우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제발 내년에는 백신이 효력을 발휘해 이 행성이 별 탈 없이 23.5도 기운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한다.
신앙적으로 올해를 되돌아보면 참 난감하다. 주일성수를 신앙의 가치라 확신하며 매주 찾던 예배당을 찾은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다. 방역조치를 무시하는 혹은 가벼이 여기는 교회들로 인해 기독교가 빛의 역할을 상실하고 지탄의 대상으로 추락했다. 아마 올해는 성탄절보다 핼러윈데이가 더 주목을 받은 기이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영원히 닫힐 것 같지 않던 육중한 예배당 문이 코로나 19로 인해 자물쇠를 채운 건 재물을 최우선 가치로 인식하며 모든 것을 외적 성장에 올인하는 교회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시는 건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배당에 빗장을 지르고 핸드폰을 통해 버전 2.0의 말씀을 뒤적이면서 믿음의 구성단위인 개인, 가족의 신앙을 진지하게 점검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교세 확장이라는 포장지에 묻힌 부부, 자녀, 부모에 대한 가치 개념이 해체 아닌 해체의 모습으로 비쳐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을 살피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시에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홀로 있게 창조하셨다. 이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은 혼자 있어야 할 때도 필요함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아무도 없는 곳에 서면 하나님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대면 나아가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이 가능하다. 객지 생활 6년째 이어지면서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인간을 부부가 아닌 단독으로 창조하신 이유를 유추할 수도 있을 듯하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 아라비아 광야로 갔던 이유도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함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회적으로 짚어보면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사람과의 만남이 꺼려지는 어려운 상황이고 지역 상가들이 하나 둘 간판 불빛을 끄고 그동안 감사했다는 폐업 인사문을 붙이는 것을 보노라면 마음이 무너진다. 삶을 살아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임을 아는 나이가 되어서 일까. 자영업자를 비롯한 아르바이트 학생들, 중소기업 종사자 등 경제적으로 모퉁이에 접힌 사람들을 생각하면 부유한 교회들이 물 위에 식물을 던지는 모습이 절실히 요구된다. 매년 수억 원에 이르는 그 많은 예산을 우는 자들에게 던져야 한다. 다시 채워 주실 것을 믿는다면 말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도 어려운 자를 돌아보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 당시 교회는 할례를 받는 것이 옳은가 아닌가 논쟁이 한창이어서 할례자들(유대인)의 사도, 이방인의 사도라는 말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구원과 관련이 없다. 다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마지막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젊은이들의 일자리 문제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이틀 전 신입 직원 2명이 우리 지점으로 배치되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디지털 인턴으로 4개월간 근무한 직원 3명이 떠났다.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은 신입사원들에게 축하할 일이다. 앞으로 많은 경험이 필요하겠지만 노력한 만큼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배려하는 건 우리 기성세대의 의무이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대학 진학률이 20-30% 정도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본인이 조금만 노력하면 괜찮은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90%가 대학에 진학하는 시대다. 치열하게 살면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온 세대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는 현실은 정치하는 자들을 포함한 우리 세대들이 깊이 성찰해야 할 문제다. 청춘이 밤하늘 별처럼 반짝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사회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대기업들도 이윤추구에서 조금만 시선을 돌려 사회의 연약한 푸른 잎들을 거두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으면 한다. 수 십 년간 국가와 국민들 덕분에 지금의 위치에 올라섰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이루고 싶었던 등단은 또다시 꿈으로 남게 되었다. 방향을 틀어야 하나 접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진다. 코로나 19로 합평을 받을 기회도 줄어들어 온라인으로라도 지도를 받고 싶은데 통로가 마땅찮다. 디지털대학 문창과에 입학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새벽 하얀 백지를 앞에 놓고 시집을 펼치며 다시 출발한다. 2021년 새해 아침에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마음을 한발 내딛는다. 인간들은 시간을 년, 월, 일 단위로 쪼개 놓았지만 시간은 여전히 아날로그적으로 이어져 일렁인다. 나도 시간의 등을 타고 같이 흘러간다. 2021년에도 코로나 19와의 사투는 계속될 것이고 백신이 보편화되어 안정화되어야 편안한 일상으로의 복귀가 가능할 것이다.
올해와 내년이 오버랩되는 이 새벽 두 손을 모은다.
모든 이웃들이 간직한 소망이 2021 신축년(辛丑年)에는 눈앞에 현실이 되기를 소망한다.
(2020.12.30. 맑은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