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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돈 Jan 08. 2022

모리아 산의 이삭

이삭의 희생(샤갈, 1966)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Some time later God tested Abraham. He said to him, "Abraham!" "Here I am, " he replied. Then God said, "Take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the region of Moriah. Sacrifice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I will tell you about."(창 22: 1-2)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But the angel of the LORD called out to him from heaven, "Abraham! Abraham!" "Here I am," he replied. "Do not lay a hand on the boy," he said. "Do not do anything to him.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because you have not withheld from me your son, your only son." (창 22: 11-12)



어려서부터 익숙한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가끔은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곤 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명령은 비윤리적인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브라함이 보인 반응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희는 너희 자녀를 이방 신 몰렉에게 주어 불로 태우는 제물이 되게 함으로써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라'(레 18:21)고 하시며 이방 종교의 행태를 악으로 규정하신(왕하 17:17) 하나님께서 인신 제사를 요구하시는 모습은 충격적이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에 있는 산으로 데려가 거기서 자신의 손으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태도 역시 의아하다.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물론 이 대답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믿음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별다른 말이 없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나를 더 당황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심히 무거웠던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고자 했을 때가 있었다. 당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주께서는 의로운 사람을 악인들과 함께 죽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의로운 사람을 악한 사람과 같이 취급할 수 있습니까?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창 18:25). 이렇게 하나님께 항변하던 아브라함이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100세에 얻은 자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이 없다. 만약 나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신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마음속에 모세의 항변이 떠오른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올 때 조금 지체되었다. 산 아래에 있던 아론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리를 인도할 신이라고 규정하고 먹고 마시며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하셨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선다. `어째서 이집트 사람들이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산에서 죽여 지상에서 없애 버리려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었다는 말을 하게 하려고 하십니까? 제발 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셔서 주의 백성에게 이 재앙을 내리지 마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하소서. 주께서는 그들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자손을 주시고 또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구한 소유로 주시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출 32:12-13)라고 했다. 이 사건 앞에서는 아마 나는 "하나님 이건 너무 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저를 죽이시고 나의 자녀 이삭을 살려주십시오"라고 절규했을 것 같다.

이 사건은 집사람 사라와 당사자인 아들 이삭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이삭의 나이가 37세 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근거는 이 사건(창 22장) 이후에 바로 이어지는 23장에서 사라는 127세로 죽는데, 이때 이삭의 나이가 37세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라의 죽음이 이 사건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그만큼 이 사건은 어머니 사라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사건인 것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인 마르크 샤갈(Marc Chagall)도 자신의 작품에서 어머니 사라를 놓치지 않았다. 샤갈의 작품 `The sacrifice of Isaac`은 제단에 이삭을 누이고 칼을 들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작품에서는 이 모습을 나무 뒤에서 바라보며 두 손을 들고 울부짖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아브라함의 집사람이자 이삭의 어머니 사라이다.

나이 많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을 받아들이는 이삭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버지 아브라함을 이해했을까?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까 그런 그림은 그려질 수 없다. 자녀들은 사춘기에 접어들기 전부터 나름 타당성 있는 부모의 조언조차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상식에 어긋나는 명령과 그에 부응하는 행동이라면 어떠했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이삭에게는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싶다. 샤갈의 작품 제목은 "아브라함의 시험"이 아니라 "이삭의 희생"이다. 어쩌면 이 사건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이 아닌 이삭일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을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여준 사건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말한다. 이러한 시각은 '내가 내 이름으로 맹세하지만 네가 이처럼 하나밖에 없는 네 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므로 내가 너에게 한없는 복을 주어 네 후손을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게 하겠다. 네 후손들이 그 원수들을 정복할 것이다`(창 22: 16-17)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순종과 언약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언약에는 순종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이 사건 이전(창 13:16)에 이미 약속하셨으므로 단순히 `순종=축복`이라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나아가서 이 본문이 교회나 목회자의 요구에 무조건 순종해야 축복을 받는다는 프레임으로 인용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동의하기 어렵다.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해야만 축복을 주신다"라는 논리도 역시 의아하다. 당시 이방 종교에서 횡횡하던 문화, 가장 중요한 자신의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의식을 연상시키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수십 년 신앙생활 내내 수없이 들어왔다. 이 본문을 대하면 나란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순종을 행한 아브라함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믿음의 소유자라는 당혹감과 자괴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믿는 자이기에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과연 이 사건은 거의 최고 수준의 순종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비상식적인 요구를 하신 걸까?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이 명령을 받고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꼬박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첩을 통한 이스마엘의 출생 등, 후손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던 아브라함에게는 더했을 것이다. 어렵게 100세에 얻은 사랑했던 독자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은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다. 요즈음도 간간이 자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소식을 접한다. 자녀를 먼저 보낸 부모들의 울부짖음은 모두의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평생 동안 자녀를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몇 년 전 섬기는 교회에서 장로님 아들이 근무력증으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살아 있을 때 문병을 갔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을 들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 자신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무너지는데 당사자인 장로님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이 사건을 마주한 아브라함의 마음도 짐작만 할 뿐 모두 헤아릴 수는 없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는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 비유하자면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히 11:19)이라고 했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시고 다시 살려주실 것이라고, 좋은 것을 준비해 놓으셨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믿음이 겨자씨보다도 작은 나는 사랑하는 자식을 죽인 후에 다시 살려주신다고 한다면 나는 "No, Thank you"라고 이야기할 것 같다. 또한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난 사람이라야 네 후손으로 인정될 것이다`(창 21:12)라는 약속 곧,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확신도 흔들렸을 것이다.


믿는 자는 이 세상의 모든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를 인정한다. 이 사건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복음의 실재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브라함이 감내한 힘들고 괴로운 고통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신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사건이다. 아마 인간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그 어떤 괴로움도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만큼 고통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도록 내주셨다. 우리가 수없이 듣고 암송하는 `하나님이 세상을 무척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마저 보내 주셨으니`(요 3:16)라는 구절의 무게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대하여 이보다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건이 있을까! 사도 바울은 이야기한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롬 8:32). 이 사건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무감각하다. 올해도 힘들게 시작하는 우리들은 여러 가지 바람을 마음에 품고 기도한다. 우리 자녀들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것, 삶의 터전의 경쟁에서 승진하는 것, 그리고 지난해에는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싶었던 사업의 회복을 기대하는 것 등.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죽이셨다는 사실은 잊은 채로 우리는 자신의 바람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성취된 결과물을 놓고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이 거들어 주셔서 내가 했다는 거잖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본문을 묵상하니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아들을 주고 너를 선택했거든". "너 힘들지, 지금도 울고 싶은 마음을 안고 나를 찾고 있는 너를 나는 너무도 사랑한단다".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 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묵묵히 모리아의 한 산으로 올라가는 이삭의 모습도 선명하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 마침내 인간의 대속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마 10:28)을 본다. 본문은 순종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프레임을 제시하는 사건이 아니다. 죄인인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롬 5:8) 한 사건이다. 이 사랑의 무게가 아브라함의 마음을 통해 현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 강하게 다가온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여전히 힘든 문제를 안고 무릎 꿇는 우리들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면서까지 너를 사랑했단다"라는 음성을 들으며 복음의 의미를 되돌아보는 새해가 되기를 기도한다. 언제부터인가 타성에 젖어 천연덕스럽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움찔 놀란 적이 있다. "이러면 안 되지" 마음을 다잡는다. "내가 믿는 자입니다." 이 고백을 내뱉으며 십자가를 묵상했던 그때의 경건함을 찾는 새벽이다.

(2021.01.08. 새벽, 사택에서. 맑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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