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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돈 Feb 19. 2021

노모(老母)의 일기장

1950년대-2000년대

항상 숫자를 짊어지고 무언가에 쫓기듯이 뛰어온 일상을 접어 두고 잠시 쉼을 얻는 휴가였다. 일상의 부담감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로 복잡해지는 마음은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을 스스로 반증하는 듯하다. 고속도로가 거의 주차장이라 그러려니 하고 톨게이트에 들어서며 안도의 한숨이다. 몸은 피곤한데 눈앞에 펼쳐지는 치악산은 깊은 하늘을 배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모습이 여전히 그대로다. 결국 모든 건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내가 변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 어떤 의미인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하지만 올해는 유달리 보름달이 서럽다. 강원도에서 노모가 바라보는 달이 내가 도회지에서 바라보던 그달이었음을 왜 몰랐을까! 그리고 자식들이 바라보고 있는 달도 동일한 달이었음을 깨닫고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이번 연휴가 짧아 계획을 세우기에는 무리였다.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냥 좋은 날이다.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소식만 알려주고 얼굴을 비치지 못하는 조카들도 있지만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고민을 잘 알고 있기에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낸다. 


국민학교 시절 써 놓은 일기장에 작은 기록이 있다.

언젠가 내가 어머니께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 달은 언제 피어?"

"아들, 달은 피는 게 아니라 뜨는 거야"

"......."

"피는 것과 뜨는 게 뭐가 달라. 모두 숨었다가 나오는 건데"

피는 것과 뜨는 것이 다르다는 의미를 알게 되면서 유년시절과 이별하게 되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점점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담장에 도열한 코스모스를 꺾어서 잎을 뜯으며 마음을 달랬던 기억이 있다. 세상이 받아주는 생각, 세상에서 유통되는 언어를 받아들이면서 더 이상 나는 꿈을 꿀 수 없었다. 어머니는 시무룩해 있는 나를 알아채고 기분을 풀어주려고 용돈을 주셨던 기억이 있다. 물론 내가 무엇 때문에 심통이 나 있는지는 알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우리 삼 형제 한 시절의 기록인, 초등학교 일기장과 건강 기록부, 성적통지표 그리고 각종 상장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보관해 놓으셨다. 몇 년 전 어느 명절날, 더 이상 보관이 어렵다며 우리 삼 형제들에게 모두 보내셨다. 나의 유치부 어린시절부터 대학졸업때 까지  모든 기록이 오롯이 담겨있다. 기억이 희미한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 문예반 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모르는 나를 어머니는 기억하고 계셨다. 지금도 그 자료들을 가끔 열어보며 세월을 거스르고 있다. 나에겐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픈 유일한 보물이다.


어느새 어머니는 팔십 줄에 접어드셨는데 꺼먹 동자가 침잠한 안쓰러운 얼굴엔 잔주름이 가득하다. 뵐 때마다 살이 내려 왜소해지고 허리가 ㄱ자로 굽어지시는 것을 보면 내가 그렇게 만든 것 같아 마음으로 물이 흐른다. 특히, 딸이 없어 답답할 때마다 장남인 내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것을 건성으로 들어 넘기던 기억에 죄송한 마음이다. 집에 있는 사진앨범을 꺼내면 가끔  낡은 흑백사진으로 박제되어 있는 어머니의 세월을 더듬곤 한다. 


한가로운 오후, 벌러덩 누웠는데 옆에 조그마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매우 낡은 노트가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무엇인지 궁금해서 책장을 열고 한 권을 꺼내보니  어머니가 국민학교, 중학교 학생 시절에 쓴 일기장이었다. 단기 몇 년, 날짜, 날씨 등을 기록하며 써 내려간 일기장은 한두 권이 아니라 50여 권에 이르는 제법 많은 자료다.  어머니 손을 잡고 내가 가져가 읽고 돌려드리겠다고 했다. 정말 오랜만에 만진 어머니 손은 뼈만 앙상한 손가락에 온기가 돌지 않는다. 울컥하는 마음을 추스르고 극구 만류하시는 어머니를 설득해서 보자기에 싸가지고 고이 모셔왔다.


집에 돌아와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며 서재에서 이틀 동안 읽고 있는 중이다. 연필로 기록된 것이라 희미해진 곳이 많아 신경을 곤두세워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노트 표면에는 '몇 호'라고 표기를 해 기록한 순서를 알 수 있다. 어머니의 꼼꼼한 성격이 그대로 녹아 있다.  '환'이라는 화폐단위가 등장하고, 교회 종소리, 6.25사변, 책보자기, 기워 입은 셔츠, 쓰봉(양복바지), 만년필 촉 등 다양한 단어들이 춤을 추고 있다. 어머니도 유년시절이 있었음을 미쳐 알지 못했다. 꿈 많던 여중생 시절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1/4 정도 읽었는데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어머니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잡히기도 한다. "그래서 그때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 하고 유추해보기도 한다. 아직은 다 읽지 못해 무어라 이야기할 수 없지만 다 읽고 나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한 대목을 기록해 본다            



단기 4288년(1955년이다), 4월 16일 토요일 일기(비)

난 반(梅蘭菊竹의 표현으로 초등학교 반의 이름인 듯)의 어떤 동무(친구)가 말하기를 친구끼리 말을 트지 않는 일들이 있는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손을 들어 본 결과 참으로 많았다. 그중 한 사람으로 나 역시 포함되어 있다. 선생님께서 친구 사이에 말을 하지 않으면 정학이라는 처분을 한다고 하셨다.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면  우선 말을 옮긴 사람이나 곧이들은 사람이나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불만이 생긴 것이다. 성공할 때까지 말하지 않겠다고 내가 그랬을까? 또한 장난으로 그런 것인데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내가 대답하기를 참된 사람이 내 성공의 목적이라고 하였으니 아직도 성취될 날은 멀기만 하다.

어머니의 일기장(1955.04.16)


초등학생 여자아이의 당찬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미소가 번진다. 아마 친구들의 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오해로 인해 발생한 해프닝을 기록한 것 같다.

글을 읽다 보니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스쳐간다. '군대 가기 전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가 지나온 그 질풍노도의 시기를 어떠한 모습으로 넘기셨을까? 포병 하사로 제대하셨다는데 군 생활은 어땠을까? 어머니와 만나던 총각 시절의 생각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머니의 일기장을 다 읽고 나면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찾아 녹음기를 들고 내려갈 작정이다. 시간이 흐르면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기록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나를 깨운다. 벌써 새벽으로 향하는 시간,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며 군 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를 떠올린다.

(2021.02.19. 맑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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