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낯선 부고장을 받았다. 보통은 지인의 부모나 조부모의 상을 알리는 부고장인데 그날 받은 부고장에는 선명하게 친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잠시 멍한 상태가 이어졌다. 눈을 비비고 다시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역시나 친구의 이름이었다.
대학시절 우린 둘 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학교에 입학했다. 동기생보다 두 살 넘게 차이가 나는 경우는 많지 않았기에 금세 친해지게 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역사를 좋아하고, 축구를 좋아하는 친구이기에 맞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 다 진지한 성향 탓에 우린 술을 기울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이야기를 그 당시 많이 했었다.
시간이 흘러 자주는 만나지 못했다. 가장 마지막에 본 것은 2년 전, 올해도 연락은 했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그리고 만난 곳이 장례식장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냈던 지인들과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더 자주 연락을 하거나 만나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허망했다.
요즘 책은 읽히지 않고 글도 써지지 않았다. 하지만 화려하게 휘발되거나, 빠르게 스쳐가는 시간보다는, 가만히 조용히 흘러가는 시간이 나에게 필요한 것 같았다. 그래서 김영민 작가의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이 책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
방치된 시체가 들짐승에게 먹히고 결국 뼈와 가루만 남게 되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나누어 그린 '구상도'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 승려들은 이 구상도를 통해서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
<대념처경>에 바로 구상도의 가르침이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승려들은 몸과 자아가 영원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새기기 위해 시체가 썩고 분해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 김영민,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평론, p74-75
이 글을 읽고 문득 대학시절 홀로 첫 해외여행을 인도로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인도인들에게는 죽어서 신성한 강인 갠지스강에 뿌려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바라나시라는 도시의 갠지스 강변에서는 매일매일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다. 왠지 모를 궁금함과 끌림에 하염없이 더운 날에 장작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시체를 하루종일 멍하니 지켜봤다. 물론 그 시체는 천으로 몇 겹이나 둘러져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타다만 천 사이로 검게 그을린 시체가 보이기도 했다. 그 불덩이와의 거리는 10미터도 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는 나를 막는 유리와 벽도 없었고 그저 뜨거운 열기만이 나를 막고 있었다.
그때는 죽음에 대해 잘 몰랐지만 삶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느꼈다. 지금 나도 그 장면과 함께 허무감이 몰려온다.
함께 시간을 보냈고 긴밀히 소통했던 동갑내기 친구의 갑작스러운 소식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를 위해 기도를 했다. 더 좋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강의를 해달라고, 너의 강의는 인기가 많았으니 그곳에서도 인기가 많을 것이라고 고마웠고 나중에 보자고.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 김영민,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평론, p10
아마도 앞으로는 이런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렇게 마주한 허무를 떨쳐내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게 이 글로 시작되는 것이라 믿는다.
- 김영민,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평론,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