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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pire warmth Aug 03. 2023

0. 아파트

어린 시절에 대한 모든 기록


즐거워야 했을 어린 시절이 아픈 상처로 남은 이들에게.



제가 스무 살일 때, 미대 입시 포트폴리오 목적으로 6개월간 글과 그림을 기록해 책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아파트'였고 어린 시절 제가 느꼈던 아파트에 관한 기억과 상처를 모두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부끄러운 기억들과 어린 시절의 상처를 담은 책이기에 입시 포트폴리오로 사용 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꼭꼭 숨겼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상처에 덤덤해진 20대 후반이 된 지금, 나와 같은 상처를 가지고 유년기를 보낼 누군가에게 "괜찮아질 거고, 나도 부끄러웠다"라고 말을 건네주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어린 저에겐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었고 이 상처가 얼마나 지속될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 당시에 남겼던 글과 그림을 재구성한 기록을 게시하려고 합니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스무 살의 저는 마음속에 담아둔 아픈 기억이 하나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늘 숨겼습니다. 하지만 입시를 도와주신 작가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제 이야기에 흥미를 보여주셨고 그분의 권유로 제 상처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친구들의 아파트에 놀러 가며 보고 느꼈던 경험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안에 주택과 아파트 사이의 경계, 아파트에 대한 환상, 그리고 주거공간에 대한 저의 생각을 담았습니다. 

그 당시엔 친구들의 실명을 모두 넣어서 책을 완성했지만 후에 다시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누군가의 사생활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실명 대신 친구의 특성이 드러나는 '닉네임'을 지은 뒤 기존의 글을 다시 쓰고 기록해보고자 합니다. 이 글을 시작으로 주거공간에 대한 저의 생각들을 하나씩 풀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제부터 주어인 제 자신, '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는 10년이라는 시간 가까이 집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내가 태어나 기억을 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가장 먼저 기억에 남는 첫 번째 집은 마당이 딸린 넓은 집이었습니다. 마당에는 진돗개 두 마리를 키웠고 나무도 많았고 어린 시절의 나는 항상 그 마당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았던 아주 짤막한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집은 공장 안에 딸린 작은 집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공장으로 함께 이직을 하셨고, 그 공장은 건물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으며 외국인들의 기숙사도 있는 규모가 큰 곳이었습니다. 일을 잘하는 아버지를 공장의 사장님이 꼭 채용하고 싶어 해서 우리 가족만 특별히 건물 옆에 집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사실 그 집은 창고로 쓰던 컨테이너였고 우리 가족이 들어오기 위해 짐을 빼고 정리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다섯 식구는 큰 방 한 칸과 부엌 하나로 이루어진 컨테이너집에 살았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은 외국인들 기숙사 건물에 있는 공용화장실을 썼습니다. 당시 6살이었던 나는 밤에 공용화장실까지 가는 게 무서워 항상 엄마와 같이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엔 우산을 쓰고 나가야 했습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두 번째 집입니다.

공장에서 사는 건 나에게 즐겁고 특별한 기억이었습니다. 그곳의 외국인들은 어린 나를 이뻐해 주었고 첫 번째 집보다 더 넓은 마당에서 뛰어노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는 것은 우리 부모님에게 크나큰 상처였습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공장에서 쫓겨나야 했고 쫓겨나는 순간부터 우리 가족은 집을 잃고 밖으로 내몰린 신세가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에게 큰 스트레스였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부터는 공장에서 살았던 것이 마냥 즐거웠던 기억은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너무 힘들었던 우리 가족은 단돈 몇백만 원을 들고 목포에서 먼 의정부로 이사했습니다. 갑자기 짐을 싸라는 말에 급하게 짐을 쌌고 큰 트럭에 탔으며 잠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낯선 집이었습니다. 그곳이 나의 세 번째 집입니다.


세 번째 집은 외미마을이라는 작은 마을에 위치한 주택이었습니다. 집앞에 딸린 아주 작은 마당이 좋았고, 옥상이 좋았고 마을에서 뛰노는 것이 좋았기에 나는 그 집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매년 담임선생님께서 부모님의 직업이나 살고 있는 집을 조사했습니다. 선생님께서 학교 근방의 아파트 이름을 하나씩 부를 때마다 친구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우리 마을은 호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께서 마지막까지 손을 들지 않은 사람을 부를 때가 되어서야 나는 손을 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곳은 (기타) 항목이며 '주택'이라고 선생님이 정의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나는 아파트에 살지 않을까?'




어쩐지 내가 사는 곳은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은 느낌이었고 친구들은 여럿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는 점에서 소속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매년 내가 사는 곳을 숨겼습니다. 새 학기마다 친구들은 어디에 사냐고 물었고 나는 "XX역 근처에 살아"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하굣길에 친구들과 함께 걸어갈 때도 한참을 눈치를 보다가 "나는 여기까지만 가면 돼"라는 말로 친구들과 방향을 틀어 집을 향했습니다. 중학생 때까지 내가 사는 곳을 숨겼고 누구도 데려오지 않았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땐 대부분의 친구들이 타 지역에 살아서 그때서야 집을 숨기는 것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티를 내지 않아도 친구들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 충격을 받았던 경험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교내 방과 후 학교를 수강하려고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대뜸 친구가 "돈이 없어서 그래?"라고 물어봤을 때였습니다. 그 친구는 집에 갈 때마다 우리 집이 어딘지 알아내야겠다며 한 시간 넘게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계속해서 따라왔습니다. 단순히 장난으로, 그냥 궁금해서, 그냥 알고 싶어서. 순수한 핑계 너머엔 내 치부를 눈 앞에서 보고 싶은 그득한 욕망이 느껴졌고 어쩐지 무서웠습니다.

그런 장난은 그보다 더 과거인 초등학생 때도 여러 번 겪었던 장난입니다. 친구들은 그때도 나의 옷자락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서 놓아주지 않으며 나를 집요하게 쫓아왔습니다. 나는 집에 가지 못했습니다. 친구들이 따라올까 봐 무서웠습니다. 그게 어린 날의 저에게 가장 깊게 남은 상처입니다.


그당시 매일 듣던 라디오에서 한 40대 중년 여성의 사연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살던 집이 부끄러워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하굣길을 걸었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런 고민은 자연스레 희미해졌다는, 그 당시 어린 시절의 자신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사연이었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어른이 되면 아무렇지 않아지는걸까?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어른이 된 현재, 나 역시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주 조금은 미세하게 변하는 것이 있을 거라고요. 그리고 그런 변화가 없더라도 어릴 적 자신을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정도는 분명히 생길 것이라고.



이제부터 조금씩 차근차근 저의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이야기는 제가 7살때부터 19살때까지 12년간 살았던  '외미마을'에 대한 이야기와 그 곳을 아주 잠시 벗어나 친구들의 아파트에 간 경험을 털어놓습니다. 짤막한 일기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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