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보고서의 법칙
누구나 '일잘러'가 되고 싶어 한다. 야근하기 싫고, 질책받기 싫고, 승진하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잘러가 되는 방법은 참 막연하다. 영어를 좀 더 잘하면 될까? 자격증을 좀 더 따면 될까? 정치를 좀 더 알아야 할까? 물론 다 필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각자의 환경과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뭐가 더 맞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모든 일잘러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일하는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하는 글'이란 '보고서'를 말한다. 연말에 쓰는 두꺼운 보고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소 직장에서 쓰는 대부분의 글들을 말하는 것이다. 1인 기업이 아닌 이상, 모든 직장인은 정해진 체계를 따라 일할 수밖에 없다. 그 체계를 연결해 주는 모든 글들이 바로 보고서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보고서 쓰는 방법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좋은 선배나 상관을 만났다면 다행이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사실, 그 선배나 상관도 비슷한 조건에서 일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보고서를 제대로 쓰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참고자료, 소위 '좋은 보고서'를 모으는데 열중한다. 좋은 보고서들를 따라서 쓰면 그나마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나쁜 보고서'가 훨~씬 많다는 게 문제다.
다행히, 우리의 이런 고민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해 주는 책이 있다. 바로 책 '보고서의 법칙'이다. 책의 저자는 과거 청화대에서 대통령 보고서와 메시지를 총괄한 책임 편집자로 근무했다. 저자는 그의 글쓰기 경험을 정연하게 정리한 책, '보고서의 법칙'을 통해 우리도 조금만 배우면 '일하는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 보고서는 명백한 법칙과 매뉴얼 있는 루틴 한 글쓰기이기 때문에, 패턴을 익히기만 하면 누구나 일정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적재적소(適材適所)'의 방식이 아니라, '적소적재(適所適材)'의 방식이 필요하다
- 보고서의 법칙, p.185
나는 요즘도 주변에서 '글을 쓸 때 내용만 분명하다면 글의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말을 듣곤 한다. 이 말에는 글의 형식은 내용을 구겨 넣는 자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아마, 내가 일하는 직장에는 소위 '이과생'들만 모여있기 때문에 이런 편견이 더 심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나와 내 동료들은 일을 열심히 한다. 보고서도 많이 쓴다. 내용을 꽉 채우고, 양을 늘리고, 나름의 아이디어와 주장도 담아낸다. 그러나 상사들은 그 보고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오리혀 질책만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상사의 부족한 인지 능력만 탓한다. 물론.. 그래서인지, 나와 주변 동료들 중에서 소위 '일잘러'로 평가받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편, 저자는 글쓰기, 특히 보고서를 쓸 때는 '적재적소'의 방식이 아니라 '적소적재'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적재(내용)로 적소(형식)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적소(형식)에 따라 적재(내용)를 선택한다면 보고서 작성 과정이 훨씬 명료해진다는 것이다. 즉, 글의 형식이란 보고서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내용의 요소들을 중복과 누락 없이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보고서의 형식을 조리법에 비유하기도 한다. 조리법을 모른 채 음식 재료만 잔뜩 모은다고 요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조리법에 따라 거기에 맞는 음식 재료를 선택해야 원하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저자의 이런 설명을 들으니, 나와 내 동료들이 지금까지 왜 '일잘러'로 평가받지 못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음식 재료를 잘 모아놨으나,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내지 못했으니, '맛이 없다'는 평가는 어쪄면 당연했던 것이다.
모든 글을 관통하는 공통된 형식이 있다. 바로 '피레미(FiReMe) 법칙'이다.
- 보고서의 법칙, p.189
저자는 보고서를 쓰는 형식으로 '피레미 법칙(FiReMe)'을 소개한다. 보고서의 시작에서 낚시(Fishing)를 던져 상사의 관심을 끌고, 중간에서 그에 합당한 근거와 이유(Reasoning)를 펼쳐 보이며, 마무리에서 상사의 사고의 변화,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메시지(Message)를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인간의 두뇌 및 사고 구조와도 잘 들어맞는다. 인간의 뇌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두뇌의 가운데 부분에 변연계가 있고 그 주위에 신피질이 둘러싸고 있다. 변연계는 인간의 감정, 본능, 동기, 의지, 결정을 관장한다. 신피질은 인간의 이성, 언어, 추론, 논리, 분석을 관장한다. 변연계는 결정하고 실피질은 그 결정이 합리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맡는다. 즉, 보고서의 시작은 변연계(감정의 뇌)에 호소하는 것이고, 중간은 신피질(이성의 뇌)에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무리는 행동과 결정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저자가 소개하는 보고서 기본 형식은 다음과 같다: 낚시(제목, 개요, 추진 배경), 근거와 이유(현황, 문제점과 원인, 해결 방안), 메시지(기대효과, 조치사항)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피레미 법칙을 장황하게 설명한 것 같긴 한데, 그 기본 형식을 보니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보통의 보고서를 저렇게 쓰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겉만 알고 속은 몰라서 드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추진 배경과 현황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사실, 나는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비슷비슷한 말 같았기 때문이다. 차이점은 보고자가 개선 또는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에 달려있다. 즉, 추진 배경은 보고자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현황은 보고자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란 말이다. 이렇게 각 형식들의 정확한 의미와 쓰임새를 이해하니 과거의 내가 얼마나 보고서를 엉망으로 썼는지 부끄러워졌다. 솔직히.. 남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몰랐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책 '보고서의 법칙'은 앞서 설명한 피레미 법칙을 기본으로, 다양한 보고서에 맞는 변주 방법을 소개한다. 단순히 이론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저자가 청와대에서 접한 보고서들을 선별하여 소개한다. 사실 청와대에 보고된 보고서는 다~ 잘 써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리고 내 눈에는 분명 잘 쓴 보고서라는 생각이 드는데, 문제점이 많은 글이라는 저자의 설명이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 책은 분명한 실용서이다. 납득할 말한 이론을 충분히 설명하고, 그 것을 뒷받침 할 수 잇는 예시를 풍부하게 소개한다. 그 예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분석한다. 그리고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타박타박 설명해준다. 솔직히, 그리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다양한 보고서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하니 좋은 예시도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예시가 정말 다양해서 필요에 따라 여러번 골라 쓸 수 있을 것 같다. 냉장고 처럼 필요할 때마다 열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두에 언급하긴 했지만, 우리 모두는 일잘러가 되고 싶어 한다. 솔직히 많이들 노력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일잘러 들의 공통점, '일하는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은 다들 조금씩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진정한 일잘러가 되고 싶다면, 이 책을 통해 좀 제대로 된 '보고서'를 쓰는 방법들을 익혀보면 어떨지... 조심스럽게 추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