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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빈 Jul 11. 2021

뮤지컬 <베르테르> 리뷰

황홀경의열병 같은사랑 이야기




작년 가을 20주년 공연으로 극을 올렸던 <베르테르>가 스크린으로 찾아왔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놓친 극 중에 하나였던지라 개봉 소식을 듣고 바로 영화관으로 달려가 챙겨 보았다. 


사실 뮤지컬을 실제 극장 공연이 아닌 곳에서 보는 것도 처음인 데다 영상으로 찍은 게 몰입이 잘 될까 싶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각보다 괜찮은 데다 여운이 꽤 오래 남는다. 특히 극의 흐름이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더 중요한 극이라 그런지 렌즈 너머로 가까이 보이는 디테일한 부분들이 몰입도를 한층 높여주었다.



제작사들마다 코로나 사태로 급격하게 변한 시장 상황에서 돌파구로 영상화를 많이 시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괜찮은 시도인 것 같다. 뮤지컬을 기존에 많이 보러 가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한번 곱씹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무엇보다 비교적 비싼 가격 때문에 뮤지컬에 입문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장벽을 허무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황 중계와 차이를 두자면 역시나 영화관의 특성상 긴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서 극 전체를 관람해야 한다는 점이 관극을 하는 체험과 가장 비슷하게 다가올 것이다. 


덧붙여서, 앞으로 공연예술 또한 빠르게 흘러가는 미디어의 변화에 맞추어 뭔가 새로운 방식을 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공연예술의 특성상 현장의 생생함을 완벽히 살릴 수는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 여전히 의문이 드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형형색색의 꽃이 가득한 발하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베르테르>는 기존의 웅장하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대극장 극과  다르게 매우 서정적이고 배우들의 감정들이 선율 위로 넘쳐흐르는 극이다. 


<꽃을 사세요>라는 넘버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형형색색의 꽃은 그 아름다움을 형형색색의 빛으로 나타낸다. 


처음에는 그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상징처럼 보였던 꽃이 극을 다 보고 나와서는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꽃은 각자 다른 이름과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꽃의 속성은 마치 사람과 비슷하다. 각기 다른 이름과 생김새를 가졌으며 꽃이 피고 지는 시기 또한 모두 다르다. 뮤지컬 <베르테르>에 나타나는 여러 인물들의 사랑은 마치 이런 꽃과도 같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마치 해바라기의 지고지순함을 나타낸다. 롯데의 사랑은 품어서는 안 되는 금단의 꽃, 오르카는 한 때 피었지만 이제는 져버린 사랑을 그리워하는 꽃일 것이다. 


그에 비해 알베르트의 사랑은 꽃보다는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게 결실을 맺어 피는 꽃보다 항상 한결같이 푸르고 곧은, 그런 감정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형형색색의 꽃이 핀 발하임은 마치 이런 여러 사랑의 감정들이 겹겹이 중첩된 곳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마다 꽃을 들고 미소를 띠며 춤추는 앙상블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발하임은 낙원'이라 노래한다. 작은 동네이지만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발하임 사람들은 티 없이 맑고 행복해 보이기만 한다.


꽃이 가득한 발하임은 어느 시의 한 구절처럼 정말 아름답게 그려진다. 거기에 감성적인 선율이 더해져 그 아름다움은 배가 되지만 그럴수록 슬픔의 깊이는 더 진해져 간다. 


넘버 전체적으로 현악기 선율을 이용하는데 초반에는 경쾌하게 들리던 선율이 점점 베르테르의 운명처럼 구슬픈 음색으로 울려 퍼진다.




극 초반 롯데가 노래하는 자석산의 전설은 베르테르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노래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호기심 같은 사랑에 이끌렸지만 그것이 결국은 왕자를 삼켜버린 자석산의 전설이 된 것처럼, 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강렬하고 뜨거운 이끌림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스스로 그 사랑의 이끌림이라는 강렬함에 붙잡힌 사람은 카인즈와 베르테르 일 것이다.


카인즈와 베르테르는 겉으로는 아주 연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사랑 앞에서는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받아도 깊게 파여 잘 아물지 않게 된다. 이런 유약한 인물들이 사랑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 된 듯 강경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한 두 사람을 보며 이런 지독한 사랑이 다 있나, 싶을 정도의 생각이 든다. 오르카는 이들을 위로하며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게 사랑이라고 노래하지만 어쩐지 조금은 그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베르테르와 카인즈는 어쩌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질지언정 잊히지 않는 마음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 순간에 사랑에 모든 마음을 바친 것이다.




언젠가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지 않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서로가 감정을 공유해야만 사랑이지 않냐는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했던 적이 있다. 


정말 짝사랑은 사랑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일까. 한 때는 그 말에 조금은 동의했지만 이런 사랑 이야기 앞에서는 쉽사리 판단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눈부신 아름다운 세상 속의 파멸. 애초에 어쩌면 예견되어 있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실로 먹먹한 감정이 오래 남는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지독한 열병 같은 사랑이다. 들끓는 열병에 시야가 흐릿해져 황홀경을 보는듯한 그런 뜨거운 사랑. 


누구나 이런 열병 같은 사랑을 앓기도 하지만 그것이 시간이 지나 식어버리는 사랑이 있는 반면, 그 마음이 너무나 뜨거워 결국은 다 타버리고 마는 사랑도 있다. 베르테르의 사랑은 후자의 사랑에 더 가까우리라.

 





꽃은 1년 내내 피어있지 않는다. 새싹이 트고 줄기가 뻗어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워낸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 피워낸 꽃은 얼마 피어있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 사라지고 만다. 


언젠가 여름 내내 예쁘게 피어있던 해바라기를 오랜만에 다시 보았을 때 고개를 푹 숙이고 시들해져 버린 모습을 보고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베르테르는 그 해바라기처럼, 자신의 온 힘을 다해 롯데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비록 결실은 맺지 못했지만 사랑의 마음은 베르테르의 마음 안에서 꽃으로 활짝 피었을 것이다. 그리고 햇살 같은 롯데의 모습에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스스로 꺾여 시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꽃으로 사랑을 고백한다는 사실은 가끔 생각해보면 슬픈 일이다. 영원히 피어 있는 꽃은 없는 것처럼 영원한 사랑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일까. 극의 마지막에 하나 둘 떨어지는 해바라기의 모습에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지만 사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의 이야기는 때로는 비 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끌림에 붙들리는 감정과 온 마음을 바쳐 뛰어드는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로맨틱하다. 


그것이 종래에는 파멸의 길로 몰아 들어가는 이야기라면 가슴속에 더욱 깊이 남는다. 결국 베르테르가 자신을 향해 겨눈 총 또한 롯데의 손으로 쥐어진 것이라는 것이 잔인할 만큼 슬프다. 


희극과 비극이 종이 한 장 차이와 같이 뒤집히는 것처럼, 실은 사랑 또한 그런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랑이 더해진 비극은 진한 여운으로 오래 가슴에 남는다.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여름 내내 활짝 피어있다가 해가 짧아지면 고개를 숙여 시드는 해바라기처럼, 베르테르에게 롯데는 햇살같이 다가왔지만 후에는 너무 뜨거워진 태양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럼에도 식물은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워내는 것처럼, 베르테르 또한 다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똑같이 롯데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사랑의 순수한 정의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가오는 여름에 햇빛을 향해 활짝 핀 해바라기를 본다면 가끔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떠올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그 꽃이 시들어 버린다면 이제는 더 슬퍼질 것만 같았다. 


너무 뜨겁게 불타올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열병 같은 사랑 이야기. 감미로운 선율로 가득한 넘버가 더욱 아련하게 들려올 것이다. 


베르테르가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보았던 황홀경은 무엇이었을까. 노을빛으로 물드는 극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본다. 


비극적인만큼 아름다우며, 황홀한 만큼 가슴 깊이 남는 사랑 이야기가 아름다운 발하임에서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 CAST : 규현 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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