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빈 Jul 19. 2021

영화 에세이 <리틀포레스트>

엄마의 레시피, 그 인생을 따라가는 길목에서




스무살이 되고 세 번째 맞는 여름이었다. 룸메이트들이 떠나 휑하게 혼자 남은 기숙사에서 고향으로 보낼 짐을 싸며 생각했다.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그 무렵의 나는 치열한 도시 생활에 한껏 지쳐있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티며 받은 성적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고 멋진 인연이 있지 않을까 부풀었던 마음은 그저 그런 남자들을 지나치며 사그라들었다. 


쓰는 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지갑은 늘 궁했고 딱히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시간은 늘 부족해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는게 일상이 되었다. 빠르게 나를 스쳐가는 관계들과 인스턴트 음식은 나의 허기를 완전히 채워주지 못했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바쁜 도시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잃은 나의 몸과 마음을 위한 휴식이 필요했다.



나의 고향은 비록 도시였지만 서울보다 평화로웠고 내가 자라온 집도, 가족들도, 사람들도 그대로인 곳이였다. 


반년의 휴학 생활 중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손으로 요리를 해 먹는 것이였다.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시골에서 할머니가 보내온 채소들로 요리를 해먹고 나른한 오후에는 오븐을 돌려 스콘이나 파운드 케이크를 종종 굽곤 했다. 따근한 냄새를 풍기는 오븐 앞에서 빵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은 여유로움과 설렘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모든 창작이 늘 즐겁지만은 않는 것처럼, 막상 시작해보니 요리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했다. 야채를 다듬고 고기를 굽고 음식을 끓이는 모든 과정 하나하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것은 어느 때가 알맞는 때인지에 대한 판단이었다. 채소가 언제 가장 맛있는지, 양념은 언제 얼만큼 넣어야 하는지 또 언제 불을 줄이고 켜야하는 지 판단이 서지않아 요리를 망쳐버린 적도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검은 반점이 피어버린 아보카도나 제대로 시간을 맞추지 못해 설익은 카레 속의 딱딱한 감자를 보면 괜히 속이 상했다. 그럴때면 엄마는 ‘지켜보다 적당할 때가 되면 된다’ 라고만 말했다. 엄마의 그런 짧은 답변은 당시의 나에게는 참 무성의한 대답으로만 들렸다. 


엄마는 요리에 재미를 붙인 나에게 미역국이나 오이무침 같은 자주 먹는 레시피들을 알려주곤 했다. 그러면서 작은 소리로 너도 이제 이럴 때가 됬구나, 라며 쓸쓸하게 웃곤 했다. 왜 그렇게 쓰게 웃었는지 몰랐던 나는 지금에서야 그때의 복잡한 그 웃음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의 레시피를 전수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요리를 할 때마다 떠나간 엄마를 생각하며 엄마의 레시피를 따라가는 혜원을 보며 생각했다. ‘집밥’이라는 말을 단순히 놓고보면 자취방에서 차려먹는 밥도 ‘집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엄마의 손길이 느껴진 밥상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집밥’을 먹었다는 온전한 충만함을 느낀다. 


별로 특별 할 것도 없지만 엄마의 손길이 닿은, 어린시절부터 내 몸을 채워주었던 그 음식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감정을 느낀다. 엄마의 레시피를 따라한다는 것은 그러한 추억을 따라가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레 떠나버린 엄마에 대한 화가 남아있던 혜원은 처음에는 ‘엄마와 경쟁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는 그 과정들이 결국은 자신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됨을 깨닫는다. 


그와 더불어 혜원이 그 때는 차마 이해하지 못했지만 스스로 엄마가 왜 그 때 그랬는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통해 레시피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먼저 걸어간 삶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리틀 포레스트>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다른 관계와 다르게 모녀사이는 그들만 특별히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먼저 한 여자로서, 누군가의 아내로서, 누군가의 엄마로서 그 길을 먼저 걸어간 엄마는 언젠가는 이 길을 따라 걸어올 딸을 위해 가슴에 품고 있는 마음들이 있을 것이다. 


혜원의 엄마가 쌩뚱맞게 편지로 보내 온 감자빵 레시피라던지, 집을 떠나며 혜원에게 남긴 편지는 그러한 마음일 것이라 본다. 요리를 할 때 언제가 가장 알맞는 때인지를 알아가는 것처럼 인생에도 그러한 타이밍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기를 원할 것이다. 


또한 누군가의 딸로서 먼저 그러한 과정을 밟아오며 실패하고 넘어지는 순간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정감이 주는 힘을 알기에 아낌없이 자신의 삶을 바쳐 자식에게 그런 순간들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어깨너머로 배운 엄마의 레시피는 엄마가 마음에 품고있는 그러한 감정들의 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맞는 때에 적당한 양념을 넣어 만들어야하는 요리처럼 부모로서 자식의 그러한 알맞는 때를 기다리며 이끌어주고 기다려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단순히 그 맛을 재현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 또한 엄마의 어깨너머로 배웠던 그 과정들을 유산처럼 물려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들여 재료를 손질하고 따뜻한 음식을 만드는 것은 온 마음과 노력을 다하여 그 사랑을 나누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혜원의 엄마가 혜원에게 남긴 레시피 또한 그러한 마음의 총체일 것이다. 딸이 어떤 인생을 살아갈지 걱정하는 마음과 기대하는 애틋한 마음을 눌러담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일 것이다.



요리하는 과정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잘 나타나듯 농사는 그보다 더욱 힘든일이다.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만 극복할 수 없는 일이 불쑥 생기기도 하고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가끔은 속을 상하게도 만든다. 


성인이 되어 도시에 올라오기 전 까지 산속 마을에 살았던 엄마에게 “농사 지을 생각 없어?” 라고 물은 적이있다. 그 말에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나는 너희 셋 키운 세월로 족해.” 라고 답한적이 있다. 그때는 어릴적이라, 요리를 할 때마다 적당한 때가 있다며 말하는 엄마를 이해 못 했던 지난날처럼 엄마가 왜 그렇게 답했는지 알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나와 살며 내 몸으로 직접 부딪히면 요리를 하고 밥상을 차리고, 집안 일을 해 나가며 문득 엄마도 이렇게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조금은 엄마의 말을 이제는 깨달아 가고 있다. 나도 때가 되어 자식을 낳고 기르면 그 때는 엄마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기고 기쁨과 슬픔이 넘쳐나며 나와 닮은 아이를 눈물로 심고 사랑으로 기르는 그 순간들을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그 때가 되면 엄마는 또 웃으며 말할 것 같다. 이제 너도 그럴 때가 되었다고.  



작가의 이전글 뮤지컬 <베르테르>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