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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 Jan 27. 2022

하얀 금이 그어진 곳을 향해

조해주의 시집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조해주,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아침달, 2019


1.


   조해주의 시집을 읽는 동안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었다. 아이유의 <celebrity>, 지난겨울 외출할 때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무수히 반복해 들었던 노래였다. 버스에서도 듣고, 길을 걸으면서도 듣고, 친구를 기다리면서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들었던 노래.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토록 홀린 듯 노래를 듣게 했나. 당시에는 이상하다는 생각만 하고 이유는 알지 못했는데 이번에 노래를 틀어놓고 조해주의 시집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가사 때문이었다.


잊지 마 넌 흐린 어둠 사이
왼손으로 그린 별 하나
보이니 그 유일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야

You're my celebrity


   이 사비를 들으려고 매일 수도 없이 노래를 재생했다. 한참 듣다가 지겨워서 다른 곡을 듣다가도 결국에는 다시 이 노래로 돌아와 가수가 ‘유일함’을 발음하는 그 순간을 기대했고, 어떨 때는 일부러 사비 부분만 재생한 적도 많았다. 왜 그랬을까, 를 이 시집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너는 유일해, 라는 말을 자꾸만 듣고 싶어 했던 그 계절의 마음에 대해서. 나의 어떤 부분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고 느꼈던 순간의 기분과 그 기분을 만들어낸 당시의 상황,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관조하듯 바라보는 지금의 나에 대해. 한 권의 시집을 읽으며 시인과 나를 동일시하는 게 편협한 일인 줄 알면서도 나는 거기서부터 읽기를 시작했다. 화자가 스스로를 희미하게 느끼는 순간들, 바로 그 부분부터.


점점 희미해지는 '나'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2.


하얀 천이 씌워져 있다
그것은 의자처럼 보인다
하얗고 폭신한 그것은
처음으로 직접 만든 빵처럼 보인다
그것은 햄버거와 전혀 다른 형태
그러나 나는 햄버거처럼 손에 쥔다

- 「의자가 없는 방」 부분     


   하얀 천이 씌워져 있는 것. 그것은 의자처럼 보이지만, 정말 의자인지는 알 수 없다. 하얀 천이 씌워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의자가 아니라 ‘의자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의자 같은 것은 의자일 수도 있지만 의자가 아닐 수도 있고 의자일 수도 있다. 확신할 수 없는 그것의 정체를 알기 위해 화자는 보이는 것을 묘사하고, 햄버거처럼 손에 쥐어도 보고, ‘의자처럼’ 구는 그것을 따라 코스프레 해본다. 하지만 화자가 새로 구성한 것들은 모두 ‘의자를 닮은 것’일 뿐 완전한 의자는 아니며, 각각 모두가 다른 의미와 상태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화자는 가짜 같기도, 진짜 같기도 한 의자를 만져보면서 ‘진짜 의자를 찾아볼까’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진짜’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한편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저 사물이 진짜가 아니라면, ‘나’도 진짜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화자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회의하게 한다.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의심을 반복하게 하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화자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의심을 반복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의심을 또 의심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한다.


생각을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기


   조해주의 시집에서 자아는 그렇게 목소리의 크기가 점점 작아진다. 자기 존재에 대해 의심하는 순간 화자는 더 이상 유일하고 확정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과다한 생각과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이 자아의 목소리를 축소하고, 그렇게 축소된 자아는 다음과 같은 시를 통해 현재의 불안을 드러내게 된다.


생각에게 부탁한다
제발 기척 좀 하세요
오지 않으면 어쩌지
걱정보다 병적인 것은 걱정 없이는 외롭다는 것

(중략)

언제나 병은 오직 하나
생각의 끝에 내가 없으면 어떡하지
오지 않은 생각을
붕대처럼 꽁꽁 싸맨 채
생각을 기다리는 시간
누군가가 신호를 하기 전에
생각을 데리고 도망쳐야 하는데
벌써
누군가의 가죽을 뒤집어쓴
생각이 짖기 시작했다

-「생각에게」 부분     


   특정한 대상 없이 막연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불안은 내가 진짜가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으로 드러난다. 생각이 아직 오지 않았음에도 화자는 그것이 사라진 후의 상태를 염려하며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생각은 그럴수록 진짜를 고민하는 화자를 배신하는 방향으로, 더 가짜의 상태로 나아간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과정이 굉장히 절제된 목소리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자신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일상의 이야기를 서술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감정의 표출이나 의미 부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길가의 돌멩이를 주워 그것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주변의 상황을 담담하게 묘사할 뿐이다. 이는 화자가 확신 불가의 상태에서 감정을 드러내기 머뭇거리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그보다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그 목소리를 과장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확실성에 서 있는 화자의 자리를 더욱 투명하게 만들어, 직접적으로 의미에 개입하지 않고 상황만을 통해 의미를 변주하고 재구성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투명한 존재감’은 손쉽게 대상과 주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다큐멘터리」에서 화자가 원숭이와 자신 사이에 놓인 유리에 이마를 맞댐으로 자신을 원숭이가 있는 유리창 안의 세계에 놓아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원숭이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 원숭이의 ‘바깥’을 짐작하며 화자는 자신의 바깥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보고, 부를 수 있는 것과 부를 수 없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이것은 달의 입체성과도 연관 지어지며, ‘달의 이름은 여럿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달의 변화라기보다는 그림자의 변화’라는 구절을 통해 사물의 이름이 가진 의미와 그것이 실제로 활용되는 방식, 그리고 가장 본질적인 이름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것, 하나」에서의 구분도 비슷하다. 시에서 ‘이것’은 손잡이 달린 유리병이 되었다가, 빈 유리병이 되었다가, 설탕에 절인 포도가 된다. 배꼽이라는 말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단추라 말하고 그것을 유리병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손잡이 달린 유리병이었던 ‘이것’은 시간이 지나 설탕에 절인 포도로 오해된다. 하지만 그건 정말 오해였을까? ‘이것’이라는 단어가 목적하고 있는 것과 실제 의미 사이에는 어떤 관계와 거리가 있을까? 설탕에 절인 포도를 받아든 화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맞아요, / 이것이 필요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이 의문의 연장선에 있다.

  

'맞아요 / 이것이 필요했어요'에 담긴 자아의 어리둥절함


3.


   한편으로, 유일한 존재가 아니게 된 화자는 자신을 다시 정의할 어휘들을 찾기 시작한다. 시집 전체적으로 화자가 이름 붙어지기 이전의 사물의 상태를 고민하거나, 혹은 말장난처럼 비슷한 단어의 어감을 이용해 재밌는 의미의 변주와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은 그 노력의 그 일환일 것이다.


  예를 들어 「슬립」에서는 ‘배추’에서부터 시작된 여러 감각과 관련된 사물들이 서로 연관되고 의미를 변환하면서, 화자가 느끼는 불확실성을 더욱 불확실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아삭이 아직이 되고, 먹음직이 믿음직이 되어 잘려 나간 밑동이 음식이 되었을 때, 화자는 이것의 원래 형태는 음식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원래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삭도 포기하고 아직도 포기하고 믿음직과 음식도 포기하고 ‘나는 뭘 먹고 싶은 거지?’라는 새로운 의문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렇게 도달한 의문에서 화자는 다시 한번 미끄러지면서, 자신이 볼 수 있는 건 옆모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닮은 것, 혹은 그것의 옆모습뿐이다. 이 인식의 한계에서 화자는 또다시 불확실성을 맞닥뜨린다. ‘살아있니? / 얼추’라는 대답처럼, 얼추 자신을 인식하며 투명해진다.


   그 점에서 「예감」이라는 시를 비슷하게도, 조금 다르게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감」에서는 이름 이전의 사물을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이어진다. ‘장난은 장난스러워지기 전에도 / 장난이었고 / 모래성은 부러지기 전부터 / 부스러지는 모래였다’ 같은 문장을 통해 ‘나’는 자신의 손길이 닿기 이전에도 사물은 그 사물이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내가 인식해서 그것이 된 게 아니라, 내가 인식하기 전에도 그것은 그것이었고, 나의 ‘앎’이라는 건 사후적인 일이란 사실. 이 시에서는 그 사실을 환기하며 무엇을 알게 되기 전과 알고 난 후의 구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그 점에서 화자가 하얀 금(구분)이 그어진 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은, 구분이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존재의 모호성을 향해 다시금 시선을 돌려보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함’에서 벗어나 ‘투명한 존재’가 되었을 때, 앞으로 우리가 감각하고 알아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 유일함이 사라진 자리를 허무로 채워두고 그대로 놓아둘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다른 상상력을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에서 시인이 계속해서 일상의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원래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 점에서 시적 주체는 우울했던 한 세계를 통과하고 이제 다른 세계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복해 언급하지만, 이 시집에서 화자는 끊임없이 진짜와 가짜를 고민하고, 그 사이에서 모호해지는 존재감을 건조한 목소리로 이야기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화자가 이전의 정의, 이전의 이름을 고민한다는 것은, 모호함을 통해 더 정확한 이름을 찾고자 한다는 의지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존재감을 희미하게 만들며 ‘이곳’의 바깥에 있는 세계, 원숭이가 자신을 바라봤듯 유리창 너머의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것. 하지만 지금 여기에는 아직 완전에 가까운 표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언어를 찾기 위해 현재의 언어와 상황을 결합하고 작동시키는 것.


   하얀 금이 있는 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행위는 그 점에서 현재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미약한 욕구로 해석될 수 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조해주의 화자가 앞으로 어디를 향할지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얀 금이 있는 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릴 때, 우리는 조해주의 화자가 어디를 향할지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1) Fakurian Design on Unsplash(표지)

2) Pero Kalimero on Unsplash

3) ELSIE ZHONG on Unsplash

4) alyssa hurle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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