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단어도 처음부터 카멜레온은 아니었다.
그러면 왜 영어단어는 카멜레온처럼 형태변화를 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도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다. 이 사실을 알면 놀랄 수도 있다.
고대영어와 심지어 중세영어까지도 단어에는 규칙이 있었다. 그것도 규칙성이 아주 강했다. 의외겠지만 사실이다. 마치 정리가 잘 된 거대한 고대의 도서관 같았다.
고대영어 단어는 품사부터 시작한다. 각 단어마다 품사가 결정되어 있었다.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 전치사. 접속사, 관사, 수사, 감탄사 -- 우리에게는 식상하고 지루해져 버린 문법용어들이다. 어쩌면 성문종합 영어의 목차는 그때 쓰였다면 더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품사를 알면, 단어사용하기가 편해진다. 어떤 단어이든 문장 속에서 어떻게 사용할 지 미리 알 수 있어서이다. 이것은 한글에도 있던 예측성이다. 예측을 할 수 있으면 단어사용에 실수가 적다. 예를 들어 고대영어 단어 stān의 품사는 명사이다. 결코 동사로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단어 stānian의 품사는 동사이다. 이것을 명사로 쓸 일은 없을 것이다.
품사는 단어를 일차적인 분류한 것에 불과하다. 더 세부적으로 분류가 필요하다. 같은 품사라도 문장 속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하나가 아니기때문이다. 이런 역할을 미리 일일이 규정해 놓는 방법이 바로 형태변화이다. 고대영어 단어가 형태를 변화할 때 따랐던 규칙은 굴절 inflection이었다. 굴절은 단어의 앞부분은 본뿌리처럼 변하지 않고, 끝부분만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단어의 끝부분이 꺾인 후 살짝살짝 바꾼다고 시각적으로 이해하면 쉽다.
나아가 끝부분이 바뀌면 다시 앞부분과 엉겨 붙어서 아예 또 하나의 단어가 된다. 굴절된 단어는 하나의 독립된 단어가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고대영어의 굴절된 단어형태 하나는 하나의 역할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형태 하나 = 역할 하나! 일대일 대응! 이런 규칙은 말의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영어단어도 옛날에는 이런 정확성을 추구했었다.
각 품사로 분류된 단어들은 품사마다 각기 다른 굴절의 규칙에 따라서 형태변화를 했다. 그 가운데 현대영어와 눈에 띄게 다른 품사는 명사이다.
명사의 굴절은 명사가 문장 속에서 해야 할 주요한 역할을 형태적으로 고정시켜 놓는다. 주요한 역할에는 4가지가 있었다. 주어역할을 할 형태로, 목적어 역할을 할 형태로, ~에게 혹은 ~위하여란 뜻을 전할 형태로, ~에 속해있다는 뜻을 전할 형태로 명사의 끝부분이 굴절했다. 예를 들어 stānes는 그 자체로 '돌의, of stone'이란 뜻이어서 조사 '의'나 전치사 'of'를 쓰지 않아도 된다.
이 4가지 주요역할은 다시 단수 혹은 복수의 상황인가에 따라서 형태가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stāna는 그 자체에 '돌들의, of stones'라는 복수의 뜻이 들어있다. 끝에 조사 '들'이나 '-s' 같은 것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
다시 말하면, 명사로 전달할 수 있는 8가지 상황을 8가지 굴절된 명사로 미리 다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것으로 문장을 만들 때 하나씩 꺼내 쓰고 다시 집어넣는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굴절한 명사의 숫자는 어마어마하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명사 전체가 한가지 굴절 규칙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3가지 문법적인 성(남성, 여성, 중성)으로 세부적으로 나뉘었다. 문법적 성은 명사의 특징과 하등에 관계가 없다. 이것은 순수하게 굴절 규칙을 구분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남성명사인지 여성명사인지 중성명사인지에 따라서 단어 끝부분이 변화는 특징이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예를 들어 고대영어 stān는 남성명사였다. stān은 남성의 굴절 규칙에 따라서 단어의 끝부분이 변한다는 뜻이다. 현대영어로 stone인 stān이 남성적 특징을 가져서 남성으로 분류된 것이 아니다. 현대영어로 flower인 blōstma도 남성의 굴절규칙에 따르는 남성명사이다. flower이기때문에 여성명사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영어 stān의 8가지 굴절 카드는 고대 도서관 - 명사구역 - 남성섹션에 속한 카드 서랍 속에 착착 정리되어 수납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명사 측근 품사들이 있다. 명사 앞에 오는 정관사와 형용사, 그리고 명사대신 쓰는 대명사이다. 이들의 굴절은 명사와 덩달아 똑같이 일치시켜서 사용하였다. (대명사만 약간 다르다) 예를 들어 명사가 주어역할을 하는 단수 남성명사라면, 앞에 오는 정관사나 형용사도 주어역할하는 단수남성 형이라야 한다.
se gōd stān
se (주어역할, 단수, 남성) the
gōd (주어역할, 단수, 남성) good
stān (주어역할, 단수, 남성) stone
이로써 굴절된 단어의 양은 기하급수적이 된다. 고대 영어단어 도서관이 왜 거대해졌는지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양이 얼마나 많아지든 간에 무서울 것이 없다. 도서관 단어카드 서랍에 넣어두고 규칙에 딱딱 맞추어 꺼내어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사실 어찌보면, 외울 것이 많아서 그렇지 생각하고 따질 것없이 규칙에 따라서 쓰기만 하면 아주 편리한 영어였다.
이런 고대명사가 어쩌다가 규칙성이 낮은 현대명사가 되었을까? 고대명사의 강한 규칙들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중세부터 시작되었다. 고대명사인 stān을 예로 들어보자. 이 명사는 강한 명사 strong noun로 분류된 명사이다. 강한 명사는 규칙성이 낮고 불규칙성이 커서 굴절이 심한 명사이다.
이 강한 명사가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해왔는지 '간략하게' 표로 정리해 보았다. 구체적으로 다 볼 필요는 없다. 전체적인 흐름만 파악하기만 하면 된다. 어디까지나 간략하게이다. 변화의 과정이 다음의 순서에 맞추어서 딱딱 전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꼭 감안해야 한다.
1) 고대영어 명사 stān의 끝부분은 없거나, -e, -es, -as, -a, -um으로 현란하게 굴절했다.
2) 이것은 중세영어 명사 ston으로 바뀌었고, ston의 끝부분은 없거나, -es로 간소화되었다.
3) 중세를 지나 근대가 되면서, 명사 ston의 끝부분은 서서히 탈락되어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뿌리 ston만 남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4) 이와 동시에 영어 모음의 대변화 the Great Vowel Shift 시기를 거치면서, ston의 장모음[o:]이 이중모음 [ou]로 바뀌면서 현대영어 명사 stone [stoun]이 탄생한다. 현대영어 stone에는 고대영어 stān과 중세영어 명사 ston이 했던 역할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이제는 품사가 동사인 단어를 보자. 이곳의 단어카드 서랍도 만만치 않게 많다. 동사의 굴절 역시 대단했다는 뜻이다. 굴절의 방식은 명사의 굴절과 같았다. 동사 단어의 뿌리 부분은 고정되어 있고, 끝부분만 여러 개로 굴절했다.
고대동사는, 현대동사와 같이, 인칭과 수와 시제에 따라서 굴절했다. 인칭도 지금과 같이 일, 이, 삼인칭 3개가 있었고, 수도 단수와 복수 2개였다. 헌데 시제는 딱 두 개였다: 현재와 과거뿐이었다. 고대동사는 12시제로 변하지 않았다.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지금처럼 12시제로 변했다면, 아마도 고대동사는 훨씬 더 복잡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굴절된 동사는 동사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어 14개에서 16가지 형태로 변했다. 이 굴절된 단어들이 단어서랍 안에 착착 착착 순서대로 정리되어 들어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동사 stānst는 그 자체로 "너는 돌을 던지다. You stone." 이다. 이것만 봐도 주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주어도 이 동사와 인칭과 수와 시제를 일치시켜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따라서 고대영어는 단어를 나열해 놓으면 문장 전체가 규칙에 맞게 잘 짜여진 느낌이다.
이런 고대 동사의 굴절 규칙은 어떻게 무너져 갔을까? 동사 stānian (돌을 던지다)를 한 예로 표로 보겠다. 동사 stānian은 약한 동사에 속했고, 약한 동사 중에서도 가장 약한 부류의 동사였다. 따라서 굴절의 규칙성은 매우 큰 동사였다.
1) 고대동사 stānian의 끝부분은 -ie, -st, -iþ, -iað, -um, -ede, -edest, -ede, -edon, -ian, -igende, -od로 현란하게 굴절했다. 진짜 찐 현란하다! 규칙성이 큰 동사가 이 정도라니! :)
2) 이것은 중세영어 동사 stonen으로 바뀌었다. stonen의 끝부분은 -e, -est, eth, en, 등으로 ed, inge로 아직 다소 많긴 하지만 매우 간소화되었다. 특히 과거형이 모두 -ed로 바뀐 것은 눈에 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가지고 내려왔다.
3) 중세를 지나 근대로 오면서 동사 ston의 끝부분은 서서히 탈락되어 우수수 떨어져 나가, 사실 과거형 -ed를 제외하고는 거의 뿌리 ston만 남았다. 동사도 뿌리 ston만 남겨갔다.
4) 동시에 영어 모음의 대변화 the Great Vowel Shift 시기를 거치면서, ston의 장모음[o:]가 이중모음 [ou]로 바뀌면서 현대동사 stone [stoun]이 탄생한다. stone이 동사라고? stone가 곧 동사는 아니지만, 동사로 쓰인다.
이렇게 거대한 고대 도서관은 서서히 붕괴해 갔다.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규칙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규칙붕괴는 단순한 혼란은 아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벌써 눈치를 챈 독자도 있을 것이다. 고대중세 명사의 굴절이 무너져 내리면서 뿌리 ston를 남겼다. 고대중세 동사의 굴절이 무너져 내리면서, 역시 뿌리 ston만 남겼다. 명사와 동사가 한 뿌리 ston에서 만난 것이다. 뿌리 ston이 명사는 물론 동사까지 다 흡수한 것이다.
영어를 관리하는 국가기관이 있던 것도 아닌데, 일반 영국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오랜 시간을 두고 명사든 동사든 하나의 뿌리 ston을 향하여 끝부분을 꾸준히 탈락시켜 온 것이다. 나아가 이 뿌리 ston의 모음을 변화시켜 현대영어 stone을 만들었다. 따라서 현대영어 stone이 명사도 되고 동사도 되는 것은 영어 원어민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만들어 온 것이니까.
그러나 현대영어 stone의 형태변화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고대중세와는 아주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고대나 중세영어 같은 규칙을 만들지 않았다. 예측성과 정확성을 주는 규칙보다는 영어 특유의 유연성과 적응성을 백분 살리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실제로 현대영어 단어 stone이 변한 형태는 Stone, stone, stones, stoned, stoning에 5가지에 불과하다. 이 5가지 형태가 명사 (이름, 셀 수 있는 단수명사, 셀 수 있는 복수명사. 셀 수 없는 단수명사)는 물론 동사 (긍정, 부정, 의문, 12시제, 능동, 수동, 직설, 명령, 가정) 그리고 심지어 형용사까지 다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음은 몇 가지 기본적인 예들이다.
I threw a stone at a dog.
He collected many stones.
The dragons' bones turned to stone for years and years.
나는 개에게 돌 하나를 던졌다. (셀 수 있는 단수명사)
그는 많은 돌을 수집했다. (셀 수 있는 복수명사)
공룡의 뼈는 오랜동안 돌처럼 변했다. (셀 수 없는 단수명사)
He stones that criminal.
People stoned the wall.
그는 범죄자를 돌로 쳐서 죽인다.(3인칭 단수, 현재)
사람들은 벽에 돌을 던졌다. (3인칭 복수, 과거)
Stoning is a form of capital punishment.
The ancien law allowed stoning punishments.
돌로 쳐 죽이기는 사형의 한 형태이다. (동명사)
고대 법은 돌로 쳐 죽이는 처벌을 허용했다. (형용사)
같은 형태가 이렇게 다양하게 변하는데 어찌 카멜레온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대 도서관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그 안에 작은 카멜레온들이 하나씩 하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콘텐츠아트 진에게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