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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텐츠아트 진 Jul 29. 2024

뉴요커의 새장

뉴욕의 평평한 길바닥에서 미국의 개인주의를 발견하다


불안감

뉴욕의 거리는 걷기가 좋다. 안전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뉴욕은 서울보다 불안감이 훨씬 높았다. 그 당시 서울의 불안도가 3이라면 뉴욕은 6.5 이상으로 느껴졌다. 사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이것은 기숙사 방문을 열자마자 나를 정면에서 맞이한 창문으로 대번 알 수 있었다. 감옥철창이 안쪽에 달려있었다. 밖같쪽은 나무판으로 아예 꽉 막아 놓았다. 그렇다. 창문이 없는 창문이었다. 밖을 못 보게 하는 창! 내 방이 2층에 있어서란다. 나쁜 놈들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란다. 상상하기도 싫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 밤, 자정 넘어 건물 바로 바깥 도로에서 경찰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Every hair on my body literally stood on end.


일주일 내내 들렸다. 영화에서나 나오는 연출된 상황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뉴욕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일상에는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신기하게도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안 듣는 거다.


기숙사 건물을 중심으로 피해야 할 곳에 대한 정보도 입력되었다. 예를 들어 마약인 소굴인 기숙사 오른쪽 옆 건물, 범죄자들이 사는 브로드웨이와 암스테르담 000가 가로블록, 범죄행위가 일어난다는 동할렘 East Halem 등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기숙사 앞 허드슨 강변 공원 북쪽은 심지어 대낮에도 여자 혼자 거닐기에는 안전하지 못하다. 웬 남자가, 젊던 늙었던, 다가와 직업을 걸면 'NO'를 정중하게 하고, 가능한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그러나 빠르게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도 배웠다. 택시 운전사도 포함되었다. 이렇게 주위에 실질적인 위험요소가 많았다. 피부로 느껴질 정도니까. 따라서 누구나 '혼자 자신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 낯선 곳에서 새로 느낀 자기 방어 의무감이었다.



웬 안정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거리를 걸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묘한 안정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불안감이 높은데 왜 안정감이 느껴지는 걸까? 의외의 느낌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느낌이었다. 결국 그 생각은 답을 찾아갔다. 그것은 길바닥이 평평하다는 데 있었다. 


I really enjoyed that remarkable flatness 

of New York City streets

built on Manhattan island.


이 평평함은 맨해튼 Manhatten 거리의 질서 정연한 규칙성에서 더욱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여의도 섬의 약 20배 정도가 되는 맨해튼 섬 전체가 블록을 단위로 잘 구획된 탓이다. 블록단위의 길 구획은 19세기 초 1811년부터 일부러 계획을 하여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다고 한다. 특히 가능한 블록의 오른쪽 귀퉁이를 직각으로 맞추어 설계되었다고 한다. 마치 '그리드'처럼 말이다. 



Mahattan Grid



분리감

그리드를 수직과 수평으로 가르는 블록은 서로 잘 분리되어 있었다. 이 블록의 귀퉁이를 돌면 다른 세계가 출현하는 것 같았다. 블록마다 분위기가 독특했다. 예를 들어 범죄자들의 블록은 젊은 남자애들이 담력시험하는 블록이기도 했다. 나도 입구에만 살짝 들어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브로드웨이의 활기는 싹 사라지고 병든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 얼른 도망치듯 다시 돌아 나와야 했다. 그런데 그 블록 반대편 암스테르담 쪽으로 귀퉁이를 돌면 또 다른 세계이다. 거기에는 거대한 성공회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웅장하고 성스러운 유럽풍의 분위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거기서 몇 블로만 위로 가면 대학가이다. 교회에서 하지 말라는 짓은 다 하고 다니는 대학생들로 우굴우굴하다. 어떻게 같은 영역 내에 이리 다른 분위기가 공존하는가? 블록마다 거대한 자물쇠가 걸려있는 투명대문이 있는 것 같았다. 


It was a remarkable sight:

criminals, religous figures, and eclectic undergraduates

could live together in the same neighbourhood.



투명감

게다가 한 블록은 매우 짧다. 블록의 세로길이가 약 80미터쯤 되니까. (가로길이는 좀 길다) 일이 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이것이 이유였다. 실제로 열블록 이상을 걸어도 그다지 피곤하게 느껴지지 않는. 가장 많이 걸어 본 블록 수는 70개 정도인 것 같다. 날씨 좋은 날, 볼거리로 꽉 찬 브로드웨이를 걷다 보면, 이런 탈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일 편리한 때는 역시 수업에 늦었을 때이다. 마음이 급하면 짧은 거리도 길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그냥 한 달음에 가는 느낌을 주니까. 공부하느라 노느라 아침이 바쁜 학생들에게 너무나 관대한 길이기도 했다. 또한 길 찾기도 편하다. 길을 잃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편리함이 아니었다. 누가 어디 있고, 설사 범죄자라도, 뭐가 어디 있고, 그것이 큰 건물 사이에 끼어서 납작한 한 평남짓의 작은 베이글 집이라도, 다 알 수 있는 투명함이 있었다. 투명하면 보인다. 보이면 알 수 있다. 알면 불안감을 '적어도' 피해 갈 수 있다. 이건 나만의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불안해도 안정감이 있을 수 있던 것이다.



Crosswalk at NY, NY



액자 안에 넣어진 서울거리

낯선 거리가 풍기는 투명한 매력은 내가 평생 걸었던 서울거리를 액자 안에 넣어 보게 했다. 구불구불, 좁아졌다 넓어졌다, 오르락내리락했던 길, 수업에 늦었을 때마다 헐떡거리며 올라 다녔던 가파른 산길, 그래서 우리끼리 골고다 언덕이라고 했던 길, 어딜 가도 이름 있는 건물은 대부분 높디높은 곳에 있어서 팔자인가 보다 하며 꾸역꾸역 다닌 길, 그 당시에는 남대문에 한번 발 디디면 미로에 빠져 아무 데로 나와야 했던 그 복잡한 길,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찾기가 쉽지도 않아서 다니던 길로만 다녀야 편했던 그 길들을 그런지도 모르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 길에서 만난 모르는 이는 외모나 행색을 보고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만 해도 아직) 알고 보면 다들 누구의 누구, 누구의 누구로 다 연결되어 있을 법한 사회였으니까. 서울의 길처럼. 그런 전통이 만들어 낸 것은 공통이라는 교집합에서 풍겨 나오는 정감이었다. 적어도 내가 미국에 오기 전 서울의 거리는 이런 교집합이 느껴졌다. 그 교집합이 너무 넓어서 진하게 퍼져나갔던 정감, 그런 '정감'이 '정서의 한 종류'로 객관화되어 액자 속에 탁탁 정리되었다. 그리곤 뉴욕거리 옆에 놓였다.



뉴요커의 새장

뉴욕 거리에는 그런 정감은 없었다. 그 거리에는 뉴욕을 찍은 사진에서 보는 것같이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실제로 아주 많았다. 가끔씩 노촌 카페에 앉아서 걸어 다니는 뉴요커를 구경하면 재미있었다. 키도 다양했다. 얼굴 색도 참 제 각각이다. 몸의 아웃라인도 제멋대로였다. 극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규격이란 것이 없었다. 참 다양했다. 참 진실로 서로에게 남이라는 느낌이 확 드는 사람들이었다. 교집합의 레이어가 참 얇았다.


대신 뉴요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만의 새장이 있는 것 같았다. 팔을 양쪽으로 뻗으면 닿을듯한 넓이의 작은 새장말이다. 그 새장을 뒤집어쓰고 걸어 다니는 것 같아 보였다. 개인용 새장 안의 주인. 다들 문을 닫고 있었다. 오히려 교집합이 생길까 봐 서로 조심을 하는 모양이다. 서로 다름을 지켜고 지켜주는 것에 더 안심을 하는 것도 같았다. 이 다름을 지켜주는 것은 뜬 구름 잡는 개념이 아니다. 지극히 물리적인 것부터 시작한다. 남의 새장을 일부러 치거나 침범하지 않았다는 뜻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에티켓이 그것이다. 'Sorry' 'Excuse me' 'Thanks'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에서 내릴 때까지 해야 했던 ''Sorry, Coming through, coming through!'까지 합치면 한국에서 평생 해야 했던 것보다 몇 곱절은 될 것 같다. 참으로 번잡하고 귀찮은 에티켓이었다.


그러나 이런 에티켓이 없었다면 아마도 뉴욕의 거리는 황폐했을지도 모른다. 기계처럼 차가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에티켓이 진심 남처럼 사는 뉴욕을 뜨뜻하게 덥혀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뭔가 기분 좋은 선선한 Cool 쿨한 느낌은 주었다. 너와 나는 (이들은 함부로 'We'를 쓰지 않는다) 남이어서 섞일 수는 없지만 남인 것은 존중한다는, 오히려 남이라서 배려한다는 아주 합리적인 인간애라고나 할까!



Newyokers walking on Broadway, New York, NY



바다 같은 허드슨 강이 옆에 흐르고 있어서 습하고 추운 뉴욕의 겨울, 다운타운의 말 그대로 차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얇은 비닐 하나로 만삭이 된 나신을 감싸고 오들오들 떨고 있던 한 흑인여성 노숙자를 본 적이 있었다. 한동안 할 말을 잃었지. 대부분의 뉴요커들은 자기 새장 속에 갇혀 바쁘게 무심한 듯 지나쳐 갔었어. 그런데 정장을 한 흑인여성이 다가가서 자신은 사회복지가라면서 명함을 주며 조용히 도움의 손을 내미는 것도 보았다. 새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한국의 할머니가 '아이고'를 난발하며 달려드는 가족 같은 찐한 정감을 가지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갑이니까 너를 도울 수 있는 거야 같은 진난 한 느낌도 없었다. 뭐랄까. 인간이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주 실천적이고 일상이 된 느낌! 도움을 주고받는데 느껴야 할 배려와 감사만이 있는 평범한 느낌! 아주 선선한 Cool한 느낌이었다.


이것이 내가 뉴욕의 길거리에서 체험한 미국의 개인주의라는 새로운 질서였다. 중요한 것은 나도 그 거리를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나만의 개인용 새장이 생겼다. 그래서 뉴욕사람도 내 새장을 건드리거나 침범하면 'Sorry' 'Excuse me" 했고, 내가 그들의 새장을 지켜주면 'Thanks' 했고, 그들도 복잡한 지하철을 나갈 때 내 곁을 치고 갈 일이라면 "Coming through"했다. 너무 가까워서 있는 줄도 몰랐던, 말로만 책에서만 듣던 나만의 영역이 그 거리를 걸으면서 난생처음 인식되었고 존중받았다. 아주 별거 아닌 일상 속에서 그들과 옆에 나란히 설 수 있어서, 설 수 있게 해 주어서 기분 좋아지는 개인주의 문화였다. 뉴욕 맨해튼 거리의 그리드처럼!


Everything became down-to-earth 

on Mahattan street's G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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