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브런치 작가가 되었나 (수줍은 양심 고백)
퇴근길, 뭔가 알림 소리가 들린다. 휴대폰을 열어 보니 브런치 알림을 나타내는 붓펜이 보인다.
한 손에 잔뜩 짐을 든 채 길을 가다 잠깐 들여다본 그 첫 문장 "브런치 작가..."를 보고,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을 한 후 휴대폰을 닫았다.
지하철을 타고 두 개의 짐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에야 찬찬히 다시 알림을 열어 보니 아니 이게 뭔 일?
"브런치 작가에 응시해 주셔서 감사드리지만 이번 기회에는 어렵겠네요..." 뭐 그런 내용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에게 온 게 맞나 싶어 알림을 다시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보고 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잠시 멍해졌다.
사건의 시작은 이랬다...
블로그에서 가끔 일상의 삶에 대해 글을 쓰던 나는 언젠가부터 브런치에서는 성실한 독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지친 퇴근길, 여러 작가님들의 글들로 위로도 받고 용기도 얻고 공감도 하면서 그렇게 브런치는 나의 좋은 벗이 되어 가고 있었다.
브런치를 알고 나서, 나도 조금은 더 깊이 있는 & 조금은 더 진솔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운영 중인 블로그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이미 여러 카테고리로 벌려 놓기만 한 상태인 데다 이웃들 중에는 지인들도 있어서 종종 글을 쓸 때 눈치 아닌 눈치가 보일 때가 있었다.
브런치를 알고 나서 아주 가끔...'만약 브런치에서 작가가 되면, 그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남들 눈치 안 보고 찐 나의 이야기를 써 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그리고 지금 보다 글솜씨도 더 좋아졌을 때..
그때 브런치 작가에 신청해 보려고 생각했었는데...
그놈의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이 나를 간 큰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술이 간을 해롭게는 하는 건 알았지만 내 간을 크게 만들 줄이야 ㅎㅎ).
우리 집 두 남자가 늦게 귀가하던 날, 오래간만에 갖는 혼자만의 시간이 좋았다.
혼자 먹는 식사를 챙기기도 귀찮아서 냉동피자 한 조각에 시원한 맥주 한 캔을 차렸다.
내가 좋아하는 (쪼금 더 순한) 생크라우드(4.5%)가 냉장고에 보이지 않아서 우리 집 두 번째 남자가 좋아하는 BLANC(5%)을 땄다.
그 블랑이 그날 나에게 뭔 짓을 하게 한 범인이었다.
평소라면 tv를 봤을 타이밍에 그날엔 왠지 모바일 브런치를 들여다보고 있던 나..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만큼 궁금하면서도 열지 못했던 "작가 신청하기"를 함부로 눌러 버렸다.
술이 준 취기+용기에 뭐라 뭐라 쓰고, 작가의 서랍에 딸랑 하나 있는 글을 첨부하고 더 이상 써 놓은 글이 없어서 과감하게 내 블로그 링크를 붙여서 제출했다.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참으로 무모한 도전이었다는 후회가 두어 시간 후 술이 깨고 나니 큰 파도처럼 몰려왔다.
"괜찮아.. 내가 누군지 그 사람들이 모를 건데 뭐.. 브런치에 글도 없잖아..."
"아니지.. 내 블로그를 거기에 알려줬잖아.. 그럼 어쩌지?... 아 창피해.. "
"뭐,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신청할 텐데 내 블로그를 들여다 보기나 하겠어? 작가 신청의 글에서부터 광탈했을 거야.."
"그러게, 왜 술은 마셔가지고.. 아니 술을 먹었으면 평소에 하던 tv나 볼 것이지 왜 안 하던 짓을 해가지고..."
최근 들어 부쩍이나 많아진 혼잣말이 그날 밤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솔직히 작가 신청서의 질문에 뭐라고 썼는지 지금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기억은 안 나지만 성격상 '뻥'은 치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 ㅎㅎ).
내가 제출한 작가 신청서를 다시 찾아보려 했으나 찾아볼 방법도 모르겠다.
그렇게 일을 벌이고 난 뒤 급히 '브런치 작가 되기'에 관해 글을 쓰신 몇 분들의 글을 읽어 보고 나서야 안심을 했다.
브런치의 작가 선정 기준이 분명치는 않아도 그분들의 경험담을 빌자면 나는 당연히 재수, 삼수.. 아니 십수, 이십수를 하는 게 맞았다.
그래서 당연히, 어제 브런치로부터 온 이메일은 불합격 소식일 거라 생각했고, 다시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는 일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뿔싸!
브런치 작가에 덜컥 합격이 되어버린 것이다.
(누군가는 이 대목에서 쫌 재수없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아뿔싸 였다..)
남편회사 근처 레스토랑에서 픽업한 장어덮밥을 들고 남편을 기다렸다. 함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 사건의 전말을 전하니 남편은 든든한 격려의 말을 건네준다.
"나는 자기 글 좋아.. 자기, 글 잘 쓴다고 얘기했잖아... 브런치도 그걸 알아본 거지.."
"글쎄, 블로그에 쓴 글 대부분은 바쁘게 조금은 숙제처럼 밀려서 쓴 거라서.. 난 내가 글 잘 쓰는지 잘 모르겠어. 내 글을 읽어 보기라도 했을까? 룰렛으로 돌려서 얻어걸렸나? "
"ㅎㅎ 뭔가를 봤겠지... 브런치 보는 사람들도 자기 글 좋아할 거야.."
"음.. 이왕 이렇게 된 거... 난 브런치에는 사람들 눈치 안 보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 써보려구.. 그렇게 글을 쓰면서 나를 더 잘 알아가고 싶어.. 그래서 말인데, 어느 정도 글을 쓰게 될 때까지는 자기한테도 알려주지 않으려구, 이해해 줄 거지?"
조금 서운해하던 남편은 이내 수긍을 하고 열심히 써보라고 토닥토닥해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솔직히 어떤 글을 쓰게 될지, 어떤 글이 쓰고 싶은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첫걸음을 빨리 떼지 않으면 그냥 이 자리에서 마냥 주저앉아 있을 거 같아서, 얼떨결에 브런치 작가 된 소감과 더불어 브런치 작가라는 이름은 바로 술이 가져다준 알코올성 배짱과 뻔뻔함으로 온 결과라는 솔직한 고백을 한다.
그리고.. 오늘의 맨 정신에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하나하나 그때그때 떠오르는 글들을 써 내려가다 보면..
내 이야기 구석구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지난날의 나 자신을 만날 거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기대라고 말하지만, 그건 때론 두려움이고, 때론 눈물이고, 때론 용서와 화해이고, 때론 기쁨과 환희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이제는 나를 만날 글여행을 떠난다.
오늘의 양심 고백과 함께...
p.s :
ISFJ와 ISTJ를 오가는 나는 계획(플랜 A + 플랜 B) 없이 떠나는 여행을 무척이나 두려워한다.
그러나 오늘부터 떠나는 글여행은, 계획이 없는데도 설렌다.
앞으로 내가 써 내려갈 글이 기다려진다.(부디 작심삼일 되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