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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토끼 Jul 04. 2024

이별 그 다음날

그 여자 이야기(2)

새벽에 눈이 온다고 해 일찍 가게로 나섰다.

다행히 눈은 오지 않았지만 날씨는 살이 베일 듯 춥다.

가게 문을 열고 지난밤 배송 온 물건들을 정리한다.

이 공간을 채운 공허함이 싫어 라디오를 켰다.


“그거 알고 계세요? 여자와 남자는 사랑에 빠지는 속도와 시점이 다르답니다. 남자는 처음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서 이 여자다! 하고 차지하기 위해 애쓰다가 자신의 사람이 되는 순간부터 원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대요. 반대로 여자는 자신에게 희생하는 모습에 반해서 남자에게 점점 맞춰주면서 자신을 잃어간대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맞아요!! 너무 딱 맞는 표현인 것 같아요!”

게스트들이 맞장구도 치고 반박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손은 분주히 움직이지만 머릿속엔 생각이 맴돈다.


나는 언제부터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걸까.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떻게 말 붙여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사람이 작은 호의도 깍듯하게 감사할 줄 안다. 참 신기한 사람.




여행은 내 고민의 도피처였다.


그때 당시 나는 대학가에 위치한 베이커리 카페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3월 개학 시즌을 막 지나 한 블록 건너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생기면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간간히 배달 주문 소리만이 카페 안을 채울 뿐이었다.


몇 개월간 버티던 사장님은 이대로 계속 카페를 운영하기 어렵다는 결정을 내렸다.

나도 결단을 해야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 가게에 평생을 받쳐 일할 건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애매했다. 시기도 자금도 능력도.

어쩔 수 없이 놓인 상황은 날씨만큼 추웠다.

인생에서 이렇게 큰 고민을 한 적이 없었기에 모든 순간과 걱정이 큰 산처럼 다가왔다.


여행을 떠나는 순간의 설렘은 그 모든 걱정을 잊게 해 주었지만 어수룩한 밤이 오고 취기가 오를 때면 온갖 불안과 걱정이 새어 나왔다.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했고 투정을 부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내가 옆에 가면 놀라면서 부끄러워하던 그 표정.

그저 옆에 앉아 묵묵히 내 고민을 들어주던 그 자세.

지겨워하거나 지루해하는 것 없이 진지하게.


그래서 더 알고 싶었다.

옆에 있고 싶었다.

먼저 다가갔다.

용기를 내 새로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직책, 가게, 그리고 관계 모두.


함께 용기를 내 준 그 사람 덕분에 ‘우리’가 되었다.


처음이라 서툴고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해 고통을 분담해 준 그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더 오래 함께하고 싶었다.

평생을 함께 해도 좋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라면 내 전부를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화가 났다가 가라앉았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애꿎은 상자만 구겼다.


접은 상자를 가게 문 밖에 버리고 다시 들어왔다.


“헤어짐을 알고 시작하는 인연이 얼마나 있겠어요. 저도 우리가 영원할 거라고 믿었죠. 힘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도왔어요. 그런데 고통을 나누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담스러웠어요. 나의 책임은 배가 기분이었어요. 결혼이야기가 오가면서 그 부담은 더 커졌던 것 같아요. 함께 하기 위한 약속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어요. 제 생각이 확신으로 바뀐 그날이요.”


라디오 사연에 신경이 곤두선다.

볼륨을 올렸다.


창 밖으로 매서운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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