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이 안 맞아서가 아니라요, 저도 이런 사람은 또 처음 봐서..
대학생 때 만난 동생이 2022 연말에 퇴사를 한다고 했다. 마침 그때 나도 회사에서 연말연초 휴가를 줘서 시간이 맞았다. 심지어 함께 사는 남자친구도 홀리데이 시즌을 맞아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해외에 여행을 가게 되었다. 시기도 어째 딱 맞아떨어지고, 이주나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친구를 우리 집에서 묵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는 원래 퇴사하고 미국에서 다른 사람들과 하우스를 셰어하고 있는 친구네로 재방문할 예정이었다고 했다. 내가 우리 집이 비니까 편하게 방 하나씩 각자 쓰면서 묵을 수 있다고 하자 그는 그날로 바로 호주행 티켓을 끊었다.
공항에 데리러 갔고, 우버를 잡아 집으로 픽업해 갔다. 먹고 싶다던 파스타를 해 주었다. 미리 짜 놓은 동선대로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다. 그는 이주나 가까이 되는 시간을 여행하기로 했고, 내가 효율적으로 짜 주겠다고 했다. 그는 가고 싶은 양조장 링크만 보낸 것이 다였다. 사실 여기까지도 괜찮다.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문제는 그가 정말 손가락 까딱하지 않았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우리 집에 있는 것들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 무례함, 안일함,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가 온 첫날, 수건과 샴푸, 헤어 컨디셔너, 바디워시, 비누는 뭘 쓰면 되냐고 나에게 물어보았다. 당연히 우리 집에 있는 것을 전제하에 나온 당당한 말투와 행동이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만약 짧게 지내는 것이었다면 미리 물어보지 않았어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편히 와서 쓰라고, 챙겨 오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친구는 12일을 묵기로 했다. 거의 이 주를 그냥 지내는데 자기가 쓸 기본적인 용품도 '말없이' 안 챙겨 왔다고? 처음 보는 기본적인 매너의식 결여에 첫날부터 적잖이 놀랐다.
문제가 되었던 장보기. 전에 미국에 있는 친구집에 놀러 갔을 때는 그 친구와 함께 렌트비(월세), 전기세, 수도세, 장 보는 것까지 다 나누어 냈다고 했다. 눈치보일 바에 내는 게 낫다고, 숙박비 아끼는 게 어디냐며.
나는 그냥 다른 것들은 다 혼자 감당할 수 있으니, 우리가 먹을 작은 양의 장만 봐 달라고 했던 그 장보기. 그와 같이 슈퍼를 간 첫날, 그가 나에게 물었다.
'언니 과일은 안 먹어?'
'좋아하지. 앗 지금 망고 제철이라 싼데 맛있어. 하나 먹자.'
'그래 좋아'
하고 그는 망고를 집어 들었고, $1.5라고 쓰여있는 가격표를 보더니 내려놓았다.
$1.5. 일점 오불. 한화로 천 원 정도 되는 돈이다. 너무 부담스러워하길래 말했다.
'아 그럼 그냥 내 장 내가 볼게 너 먹고 싶은 거 너가 봐.'
그는 자신이 장을 보기로 했는데, 아니라고 괜찮다고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는 시리얼을 먹고 싶다고, 세일 중인 시리얼을 골랐다. 이제 우유를 고를 차례. 같이 사서 마시기로 한 소이밀크(두유)는 고급 제품을 제외하고 평균 $1-$2이다. 한화로 천 원 대이다. 우유를 스윽 둘러보더니 그가 말했다.
'언니 집에 우유 있어?'
'어 있지. 그래 그냥 우리 집에 있는 소이밀크 마셔.'
계산할 때도 그는 옆에서 정말 가만히 있었다. 이 친구는 맥주를 아주 좋아한다. 맥주 캔을 사서 가자고 해서 나갈 때마다 보틀숍에 들러 맥주를 샀고, 함께 나눠 낼 결제는 한 번 빼고 다 내 카드로 했다. 심지어 자기가 가지고 싶은 옷을 살 때도 나에게 카드로 결제해 달라고 했다.
그는 항상 놀러 나갈 때마다 현금 $50 (한화로 4만 원 조금 넘는)만 챙겨 나왔다.카드 수수료가 붙으니 나보고 우선 결제해달라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3일 차에 그가 말했다.
'아~ 호주 여행 돈을 진짜 별로 안 쓰네?'
하. 듣다 듣다 참아줄 수가 없었다.
'네가 안 쓰니까 안 나간 거지. 너 네가 같이 먹을 거 장보기로 했었는데 콜리플라워랑 애호박 산 게 다잖아. 오늘 지낸 지 3일 째인데.'
그렇게 말해서 그도 조금 뭔가 느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술을 마시러 가서인지, 4일 차 저녁에 갔던 양조장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먼저 카드를 내미는 것을 보았다.
나는 요새 위가 좋지 않다고, 마실 때마다 힘들다고 했다. 저녁에 양조장에 갈 때마다 110m 테스팅 용 작은 잔 두 잔이 맥시멈이었다. 내 카드로 얼마를 긁었는지도 얘는 모를 테니까, 신경도 안 쓰니까 4일 째 지친 나는 내가 맥주에 얼마를 썼는지 적어서 보여주고 정산하기 시작했다.
함께 술을 마시는 동안 내가 힘들다, 힘들다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래도 양조장에 가지 말자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다.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은 다 가야 하니까.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모든 일정과 다음 동선은 이 친구가 가고 싶은 곳이었다. 나도 일 년에 한 번 밖에 없는 귀중한 연말 연초 휴가를 온전히 이 친구의 여행사로 지내는 데에 거리낌 없이 바쳤는데, 딱히 고마워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당연하게 여겼다.
내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말 잘 먹었는데, 위가 아프고 나서 요새 양이 정말 많이 줄었다. 식사 양도 적고 비싼 고기나 유제품도 소비하지 않으니 며칠 동안 먹을 야채 두세 가지만 사면 된다. 미리 같이 이야기도 된 부분이었다. 그냥 야채 그날 먹을 한두 가지만 가서 건강한 식사를 내가 요리해줄 테니 그렇게 같이 먹자고 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담당하기로 했던 장보기에서 최대한 돈을 아끼려고 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이니 나도 함께 건강하지 못한 정크푸드를 먹으며 4일을 보냈다. 라면, 감자튀김이 우리의 주식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위가 아프다고도 나는 말했었다. 친구가 아프다는데 그저 가장 저렴하게 자신이 먹고싶은 것만 먹자고 제안했다.
그는 자신의 여행인데도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12일 동안 우리 집에서 묵는 동안 어디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시드니 구경을 시켜줄지 밤까지 새 가며 일정을 짜 주었다. 날씨가 나쁘면 동선을 다시 짜고 수정했다.
갑자기 MBTI 이야기가 조금 웃기지만, 나는 정말 극명한 P다. 계획을 즐기지 않는다. 심지어 그 돈 없던 대학생 시절 처음 혼자 해외여행을 갔을 때도, 나를 위한 내 일정도 그리 짜지 않았다. 그래도 멀리까지 온 친구를 위해서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었고, 그렇게 내가 말을 했고, 이 친구도 알고 있었다. 그래. 내가 먼저 솔선수범 해서 찾아주겠다고 했는데, 정말 해도 해도 너무했다. 게으름의 끝판왕이었고 그걸 넘어서서 굉장히 무례했다.
'언니 우리 이제 어디가?'
'내일 뭐 한다 그랬지?'
'이제 어디 가?'
'이제 버스타? 트램타? 지하철 타?'
'버스 언제 와?'
'언제 내려?'
그리고 같은 질문을 십분 안에 세 번을 했다. 내가 참다 참다 웃으면서 얘기했다.
'야 너 진짜 같은 질문을 짧은 시간 안에 세 번을 물어본다.'
그랬더니 머쓱하게 웃으며 같잖은 변명을 둘러댔다. 나는 듣다가 중간에 대답했다.
'너 그거 아니야. 그냥 니가 툭 물어보면 내가 열심히 실시간으로 다시 찾아서 얘기해주고 너 데리고 다녀줄 거 아니까 그냥 귀담아 안 듣는 거야.'
그랬더니 하는 말,
'아 하하하 안 통하네~'
그는 저녁식사로 시리얼을 먹는다고 했다. 나는 집에 먹을 것이 없어 내 돈으로 산 오이 한 개와 레몬, 남은 두부 반 모로 샐러드라도 만들어 먹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친구, 진심으로 정크푸드만 먹는다. 식비에 굉장히 돈을 아끼는데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다가 건강이 안 좋아질 것 같다는 걱정까지 들었다. 혼자서 샐러드를 해 먹기도 뭔가 미안해서 물어봤다.
'00, 나 샐러드 해 먹을 건데 너 진짜 안 먹어? 아니 진짜 걱정돼서 그래.'
'아 안 뺏어먹어, 안 뺏어먹어ㅋㅎㅎ;'
장난처럼 나에게 말했지만 그의 생각은 표정이나 말투에 묻어났다. 내가 그 저렴하고 작은 오이샐러드를 너에게 뺏길까 봐 내가 물어봤을까?
하루는 저녁에 씻고 빨래를 개고 있는데, 단발보다도 머리가 짧은 이 친구가 머리를 나보다도 오래 말렸다. 그런데 머리를 말리는 소리가, 뭔가 흔들며 말리는 그런 소리가 아니고 정말 가만히 윙- 하는 소리였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걱정이 될 정도로 사람이 머리를 털며 말리는 그 소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방을 들여다보니 한 손으로 휴대폰 스크롤을 내리며 한 손으로는 헤어 드라이기를 쥐고 있었는데, 정말 말 그대로 드라이어를 쥐고 가만-히 고정한 채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장담컨대 너의 집이었다면 그렇게 머리를 최대한 오래 말리며 휴대폰을 하지 않았겠지? 호주는 한국에 비해 전깃세가 비싸다고는 이미 첫날 밤 언질을 주기도 했었는데.
나중에 나는 모두 털어놓고 말을 했다.
'이렇게 자그마한 거까지 신경 쓰게 되고 말하게 되는 게 스스로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 같고 자괴감 와. 그리고 내가 이런 감정을 왜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이런 적이 살면서 없었어서 당황스러워.‘
어제는 같이 소품샵을 돌다가 그가 너무 귀엽다고 갖고 싶어 한 양말이 있었다. 가격이 비싸지도 않고 선물을 이것저것 가기 전에 챙겨주려 했던 찰나에, 마음에 들어 하니 바로 구매해서 웃으며 건네주었다.
'Present!'
'땡큐, 근데 내 친구가~'
어? 뭐지? 마치 내가 사서 건네줄 걸 알고 있었다는 이 자연스러움은? 약간 맡겨놓은 것 같은 이 태도는? 사실 내가 그걸 집어서 계산대로 가는 나를 쳐다보는 것을 보기는 했다만. 내가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산 건 아니지만 보통 사람이 고마운 마음이 들면 이렇게 안 하잖아. 어제도 그가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티셔츠도 선물해 주었던 터라, 그냥 더 이상 선물은 해주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그가 호주에 오기 전의 일화가 느닷없이 생각이 났다. 나는 그의 일정을 신나서 대신 짜 주는 중이었고, 웃으며 그에게 장난쳤다.
'야씨 나도 나같은 친구 해외에 있었으면 좋겠다~ 너 부럽다!'
그리고 돌아온 말,
'내가 원래 좀 인복이 많아.'
집으로 돌아가는 트레인 안, 남은 밤 시간에 뭐 하지 이야기를 했다. 내가 제안했다.
'아 그럼 내가 너 침대(내 남자친구 침대) 옆에서 난 노트북 하고 너는 너 블로그 글 쓰면 되겠다!'
했더니 돌아오는 말,
'굳이 옆에서..? 우리 하루종일 내내 붙어있었는데?'
나는 개인적인 공간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다. 내 친구가 따로 있자고 해서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인색하고 이기적인 태도들로 무장한 그와 계속 여행을 다니고(시켜주고) 있었던 터라, 실컷 나를 편하게 부려먹고 이용해 먹고, 편하게 자기 혼자 쉬고 싶을 때는 그냥 각자 방으로 들어가 달라는 말과 다름없이 들렸다.
이 친구는 자꾸 자기가 '내성적이고, 사람을 혐오하고, 자기 개인 시간이 중요하다'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거의 매 대화 때마다 자신이 강조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도 나에게 친구로서 잘 대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렇게 자신을 포장하고 방어해주는 말을 함으로써 무마하려고 했던 것 같다. 노력하지 않아도 굴러가는 관계일 것이니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도 다름없다.
계속 개인 여행사 노릇을 하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트레인이나 버스를 어떻게 타는 건지에 대해서 배울 의지가 아주 조금도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음 주에 내가 회사 복귀를 하게 되면 이 친구가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혼자서 이틀의 시간이 남기 때문이다.
'나 없이 너 혼자 다닐 수 있어?'
'그럼 그냥 집에 있지 뭐~'
개인적인 시간이 너무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없는 불편하고 어려운 여행은 싫었던 것이다. 이 친구는 해외여행을 하는 내내 구글 맵 같은 기본적인 어플 설치도 되어있지 않았다. 길을 찾는 법이나 트레인 보는 법 등에 대해 물어본 적 조차도 없고, 그냥 물어볼 때마다 내가 계속 시간을 할애해서 실시간으로 체크해주는 것이 기본적인 세팅이었다. 나는 그의 내비게이션이었고, 구글맵이었고, 걸어 다니는 트레인 노선이었고, 실시간 버스 시간 체크 알람이었다.
내 휴대폰은 오래되어 배터리가 금방 닳는다. 매일 구글 맵과 버스, 트레인 시간을 체크하려면 내 데이터를 꺼 놓고 친구들과의 연락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정말 ‘내비게이션’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의 휴대폰은 최신이라 화질이 좋아 그의 폰으로 사진을 주로 같이 찍었다. 무언의 역할 분담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내 폰은 카메라구나?’
그리고 그는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사진 찍히기를 꽤나 좋아했다. 사진이 잘 나오면 잘 나왔다고 좋아하고 본인의 소셜미디어와 블로그에 자신이 나온 사진을 올렸다. 그러나 내가 찍어주겠다고, 저 쪽에 가서 서 보라고 하면 떨떠릅하게 말했다. ‘아 갑자기? 어..? 어어 그래.’ 나는 그냥 자유로이 여행 중인데 사진찍기를 참 좋아하는 친구가 찍으라고 난리를 쳐서 억지로 마지못하게 찍어주는 느낌을 원하는 듯 했다. 그냥 ‘고마워!’ 하면 될 것을, 이 친구의 ‘쿨병’은 함께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찍힌 본인의 사진들은 마음에 들었는지 소셜미디어에 열심히 업로드를 했다.
우리 집 세탁기를 쓸 때도 그의 기저에 깔려있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세탁할 옷가지가 있으면 달라고 했더니, 옷이나 속옷 등을 따로 빨지 않냐는 것이었다. 사실 이 부분은 개인차이고 맞고틀림이 없다. 문제는 콕 집어내기 힘들지만 분명 고마움이나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미묘한 문장.
‘언니꺼 내꺼 같이 빨면 더럽지 않아..? 내 꺼는 몇 개만 따로 나중에 세탁기 돌릴게.‘
내가 신는 실내 슬리퍼가 하나 있는데 세탁을 할 때가 되어 세탁을 했다. 건조가 된 후 옷가지들과 함께 들여오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뒤에서 나타나더니
‘어 뭐야! 실내화 있었잖아!! 한국인들 실내화 필요하다고 알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는데 마치 내가 기본적인 것도 제공해 주지 않았다는 저 말투와 대사. 너무 당황스러웠으나 차분히 더러워서 빨래를 했다고 사실만 말했다. 어 뭐지? 나 왜 변명하듯이 말해야 하지?
물론 매일 여행이 끝나면 그가 먼저 샤워를 하도록 했고, 나는 샤워를 한 후 우리의 뒤늦은 저녁식사를 위해 혼자 요리를 시작했다.
그가 먼저 흔쾌히 산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일한 재료다운 재료, 콜리플라워 한 개. 내가 무엇을 먹고싶냐고 하자 내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프라이드 치킨 맛이 나는 그 콜리플라워를 먹고싶다고 했다. 역시나 재료 또한 본인이 먹고싶은 것만 흔쾌히 샀다.
콜리플라워를 손질하고 튀김옷을 입히고 오븐을 예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 레시피. 하루종일 여행을 하고 저녁에 들어와 하기에는 간단한 요리는 아니었다. 일정을 마치고 저녁에 서로 피곤하다고 말하며 들어오는 길이었다. 눈치를 주는 것이 될까봐 ‘시간이 조금 걸리는 레시피다’ 라고 살짝 언급하기는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말,
‘아, 오늘 하기 힘들면 안해줘도 돼~’
그리고 우리가 먹을 재료로 산 것은 그 콜리플라워와 애호박 한 개 뿐이었다. 내가 그 요리를 안 하면 애호박 하나로 뭘 해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밤 11시 40분, 잠결에 들어있었다. 내 방은 화장실과 바로 옆에 붙어있어 그가 새벽에 물을 내리는 것도, 팬이 돌아가는 불을 켜서 위잉 소리에 깨는 것도 내 몫이었다. 물론 새벽에 문도 살짝 닫지도 않더라.
나는 잠귀가 밝지 않다. 남자친구와 살면서는 자다가 깬 적이 없다. 그래, 혼자 살아 버릇해서 그렇다고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날 자정 가까이 된 밤에는, 그가 무엇인가를 깨트렸는지 떨어뜨렸는지 소리가 크게 났다. 소음을 낸 것이야 괜찮은데 뭘 깨서 다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러 눈도 다 뜨지 못한 채 나갔다.
'뭐야 뭐 깨진 거야? 너 괜찮아?'
그는 그 시각에 본인이 챙겨 온 전동칫솔로 양치를 하고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되어있는 뚜껑을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내가 갑자기 튀어나와 놀랐는지 놀란 제스처를 취했는데, 뭐랄까. 보통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오 씨 깜짝이야! 어 나 이거 뚜껑 떨어트렸어. 깨웠구나 미안해' 정도로 얘기했을 것이고 나도 그냥 무슨 일인지 걱정되어 나왔다고 하고 마무리되었을 일이다. 그러나 그는 인상을 팍 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쳐다보며 입에 전동칫솔을 물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몇 초 간 위잉- 돌아가는 전동칫솔 소리와 나를 노려보는 눈만 존재했다.
얘가 무슨 말을 하려나? 아무 말도 안 하네? 다시 물어봐야겠다. 근데 왜 이렇게 노려보지?
'뭐 깨진 거야? 너 괜찮아?'
'칫솔 뚜껑 떨어트린 거야. 이게 들려?'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말하더니 그대로 거울을 바라보며 양치를 이어했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당황스러워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반응도 일반적이지 않은데? 왜 저런 표정을 짓고 가만히 서서 날 노려본 거지? 내가 자기 뭐 떨어트렸다고 언질 하러 달려왔다고 느낀 거겠지? 그리고 뭐, '이게 들려?' 그냥 그렇게만 말하고 하던 양치를 계속한다고?
4일 차 밤. 그간 쌓여왔던 태도 문제와, 내가 흔쾌히 나누고 감당하고 할애한 것들에 대한 묵인과, 이기적임, 인색함, 그의 무례함을 더 이상 봐줄 수 없었다. 그가 양치를 끝내자마자 그에게 내어준 방으로 가서 말했다.
'야, 너 여기 앉아봐. 우리 얘기 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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