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enevieve Jan 04. 2023

호주로 놀러 온 친구와 손절했다 (3)

자기 합리화, 부정, 회피

새벽에도 그가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그렇게 몇 시간 잠에 들지 못하고 오전 예약시간이 다가왔다.

돌아와서 건네줄 그의 물건들을 일어나서 따로 챙겨놓았다. 잘 보이도록 거실에 있는 사이드보드 위에 그의 충전기와 내가 돌려받아야 하는 어댑터 관련 물품을 올려두었다. 우리 집 세탁기에 들어있던 그의 옷가지도 한 번에 가져가기 편하도록 봉투에 담아 그대로 넣어두었다.


내가 나가기로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 계속 자길래 문을 두드리고 불러 깨웠다.

'나갈 시간 거의 다 됐는데 아직 자길래 깨웠어. 언제 나가?'

'언니 나가면 10분 뒤에 나가려고.'

'그래 그러면 들어오기 전에 먼저 장 보면 카톡 하나 남겨줘. 나도 먼저 끝나면 연락할게.'


그리고 일어나서 내가 잘 보이게 미리 정리해 둔 물건들을 봤겠지.


나는 예약 진료를 받으러 나갔고, 돌아오는 길에 폰 체크를 했다. 이런 내용의 카톡을 받았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그렇게 크게 힐난을 받아야 했던 일인지?' 일단 힐난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진심으로 웃긴데, 네가 왜 이렇게까지 힐난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야, 나는 내가 왜 너한테 다 퍼주고 이따위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 상처는 너에게 거진 시녀 취급을 받은 내가 받았지.


어제 내가 직접적으로 이 친구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와 00아, 너 책 좋아하고 언어점수도 높다 그랬는데 문해력 무슨 일이야?'


소름이 끼쳤던 부분은, '제안하는 말에 자의식이 없냐는 말에서 상처를 받았다' 는 부분이다. 저 말투와 구사하는 방식이 굉장히 이 친구가 하는 어조이고, 자의식이라는 단어도 많이 쓰는 단어이고, 어제 나는 '제안'이라던가 '자의식' 따위의 단어를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어제 양조장에서도 우리가 있었던 과거의 일을 회상할 때,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방향으로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기를 쓰길래, 그냥 두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 친구가 걱정되었다. 본인이 듣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방식으로 상상해내고 진심으로 믿으려고 한다. 정말로 저 정도면 다른 방면으로도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니 의학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못난 행동들과 성격을 이제 감출 길이 없고, 우리의 관계도 좋아질 리가 없으니, 그래도 애써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고 테이블에 돈을 올려둔 것도 꽤 흥미로웠다. $100이었는데 대략 8만 7천 원쯤. 그가 무료로 소비하고 내가 먹을 것조차 없게 냉장고를 비운 비용으로 대략 환산이 되려나. 그에게 주었던 선물이나, 투어를 시켜준다고 같이 쓴 교통비용까지 커버는 많이 무리지만, 아마 그에게 매우 큰 액수일 것이니 고마운 마음으로 써야겠다.


그는 저렇게 자신이 할 말만 던지고 나를 차단했고, 내가 하지도 않은 말에 자신은 상처받았다며 말까지 지어냈고, 회피했고, 빠르게 도망쳤다. 어제 양조장에서, 그의 마지막 10년 전 연애에 그는 잠수이별을 했다고 하며 자신은 회피형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생각났다. 훌쩍 큰 성인이 되어서도 그는 회피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고, 자신이 인정하기 싫음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창피하다고 말을 했음에도 다음 날에는 또 자기가 왜 이런 힐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태도에 전환을 보였다.


자신의 비열한 면을 마주설 자신도 없고, 돌아올 답장이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것임을 본인도 아니, 그는 빠르게 도망쳤다. 생각보다 훨씬 더 못난 사람이었다.

이 글을 보고 (감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할 말이 있으면 떳떳하게 나와 마주 보고 직접 앞에서 하기를. 나는 너와 대화 나눈 카톡도 모두 있고, 사람들 앞에서 라이브 방송으로 너와 이야기 할 수도 있다. 나는 언제든 환영이야.


그의 이모님이 타로를 보신다고 했다. 그의 인간관계가 파탄날 것이라고 했다고. 돌이켜 보니 그 이모님 용하다. 문제는 이 친구가 '쿨함 병'이 있어서, (좋게 말해서) 무뚝뚝한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고, 그렇게 비춰져도 친구들이 주변에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항상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그런 성격을 이상하리만치 대화의 주제로 올렸고 유머로 소비하고자 했다. 들어보면 그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동일했다.


 '나는 무감하고, 내성적이고, 인간 혐오하고, 인간관계에 목매지 않고, 다정함에 거리가 멀고, 신경을 잘 쓰지 않고, '쿨'한데 MBTI의 F들은 감수성이 풍부해 자꾸 나에게 서운함을 토로한다. 이렇게 게으르게 사람을 대해도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

인간관계가 파탄날 것이라고 했던 이모님의 말에도 그는 자아성찰은 도무지 하지 않을 것이다.


비슷하게 그가 한 말이 생각난다. MBTI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가 T 특성의 이야기를 재미 삼아한 것이라 심각하게 들을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모든 행동들과 그의 사고방식이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그의 말이었다.

'나는 후배한테 삶은 이해관계에서 온다고 했다가 감정 메말랐단 소리 들었어. 하지만 삶은 이해관계에서 온다.'

그래. 너 정말 이해관계 좋아하지. 장을 볼 때는 $1라도 저렴한 것을 고르려고 주저주저하던데, 우리 집 빈다고 너 방 하나 내준다고 할 때는 칼같이 결정 내리고 비행기 티켓 끊더라.


만일 우리 집에서 지낼 때에도 그가 미국에 갔을 때처럼 모두 반반 나눠 내고, 다른 사람과 셋이 셰어하고 불편하고 돈이 많이 나갔으면 애초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 알고 있지만 그건 서운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 같아도 비슷했을 테니까. 이 친구의 문제는 본인의 이득을 취하려는 자세가 정말 견고하다. 단연컨대 내가 지금까지 봐 온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인색하고 이기적이었다. 물론 그의 친한 친구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선택적으로' 모두에게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이기에.


나도 당연히 도덕적으로 결백한 사람이 아니다. 잘못된 행동을 한 적들이 분명 있다. 다만 나는 혼자 되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가지고는 한다. 최소한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끼고, 그 친구에게 연락했고, 진심 어린 마음을 전했다. 생각나는 일화가 더 있다면 나는 꾸준히 죄책감을 느끼고 사과의 마음을 전할 것이다. 반대로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 뜬금없이 나에게 그때 미안했다는 연락을 한 친구들도 있다.


인간관계, 친구관계에서 내가 성숙해질 수 있는 방향은 이렇다고 생각한다. 모두 미흡한 인간이지만 서로 잘잘못을 인정하고 깨닫는 것. 자기 합리화와 부정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하는 것. 나의 미흡하고 미성숙한 모습을 마주하고 인정하는 것.


고민이나 관심사에 있어 서로의 이야기를 할 때, 꽤나 대화가 잘 통했기에 나는 성인이 되어 이런 친구가 남아 기뻤었다. 아마 오래오래 연락할 친구 중 하나겠지 생각했었다. 그냥 인간은 모두 비겁한 부분이 있는데, 괜히 내가 너를 정면으로 보게 되어 안타깝다는 생각도 했다. 이 친구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은 아주 조금도 없지만.


인간은 모두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를 하고 기억하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쓰며 생략을 했으면 했지, 조금의 과장도 없었다고 맹세한다. 이 과정이 고작 5일 동안 일어난 일이라 너무 다행이다. 더 이상 시간과 돈과 감정을 소비하지 않고 아주 깔끔하게 끝을 맺었다. 그의 비겁함이 매개체가 되어 나의 콘텐츠로 승화했다.


너와 대화하는 시간은 즐거웠고 너에게서 배운 점도 꽤 있어. 어제 너한테 말했듯이, 나도 미성숙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한 날들이 있었어. 근데, 인정하는 게 첫걸음이야. 그냥 많이 안타까웠어. 너는 생각보다도 더 자기 방어가 강한 사람이라 아마 영원히 회피하며, 내가 이해 안 가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겠지. 내가 잘 지내라고 해도 너의 마음이나 정신적인 부분들은 잘 지내지 못할 것 같네.

나는 벌써 잘 지내기 시작했어. 안녕!


호주 데일리 라이프 & 비거니즘 콘텐츠 업로드: @genevieve_jiwoo
작가의 이전글 호주로 놀러 온 친구와 손절했다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