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렌조 미키히코, 양윤옥 옮김)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어떤 비밀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인생을 풍요롭게 해 주고, 어떤 비밀은 들켜서는 안 되는 위험한 것이어서 삶을 갉아먹기도 한다.
영화 <쉘 위 댄스(Shall we dance?)>의 주인공인 스기야마의 비밀은 전자에 해당한다. 우연히 댄스교습소 창문너머로 춤추는 여자의 모습을 본 스기야마는 호기심에 이끌려 사교댄스를 시작하고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다. 90년대 일본에서 사교댄스는 부정적인 인상이 강했던 터라, 비밀로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춤을 출 엄두조차 못 내었으리라. 비밀은 그의 일상을 반짝이게 하는 빛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이 집이 평범하고 평온했던 일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그런 척했을 뿐이다.
-본문 중에서
소설《백광》의 등장인물이 품은 비밀은 후자에 해당한다. ①시아버지 게이조, ②아들 류스케, ③류스케의 아내 사토코, ③류스케와 사토코의 딸 가요, ④사토코의 여동생 유키코, ⑥유키코의 남편인 다케히코, ⑦유키코의 불륜남 히라타. 일곱 명의 등장인물은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을 숨긴 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집 마당 능소화나무 아래서 유키코의 딸 나오코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가족의 평온은 산산조각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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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표지에 이끌려 고르게 된 렌조 미키히코의 《백광》. 처음에는 그저 그림이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보니 살인사건 현장이 그려져 있다. 표지처럼 모르고 보면 마냥 평온해 보이는 가족 내에는 사실 추악한 질투와 심각한 치정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오코 살인사건의 밑바탕이었다.
사토코와 유리코는 겉으로는 사이좋아 보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질투하고 시기한다. 사건 당일 유리코는 남편 몰래 불륜을 즐기기 위해 언니에게 나오코를 맡기고 나갔다. 유리코의 불륜 상대는 히라타 한 명이 아니었다. 비뚤어진 자매 간의 증오는 잘못된 관계와 잘못된 사랑으로 번져버린다. 한 편의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하면서도 관계의 실체와 서늘한 내면을 담담하면서도 농밀하게 표현하여 고급스럽기까지 하다.
자매의 치정 문제와 더불어 나오코를 죽음으로 내 몬 또 하나의 비밀은 게이조의 기억. 사토코가 정성으로 돌보는 시아버지 게이조는 치매를 앓고 있다. 그의 머릿속은 시도 때도 없이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한다. 그리고 트라우마를 남긴 한 사건은 그의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등장인물은 나오코의 죽음을 둘러싸고 저마다 품고 있던 비밀을 고백한다. 모두가 자신이 죽였다고 말이다. 그러나 고백 속에도 비밀은 숨어 있다. 자신이 죽였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범인일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다른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아간다.
한여름 햇빛이 그 아이를 통해 내 가슴속의 초점을 지지는 듯한 짜증스러움으로 나를 불태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아이를 남겨두고 나갔다.... 내가 그 아이를 죽였다. 내 손을 더럽히지도 않고....
-본문 중에서
일곱 명의 등장인물, 일곱 개의 고백. 배신과 거짓으로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니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기에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백광》이 일본에서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다는데 시대를 뛰어넘는 필력은 물론이거니와 빼어난 흡입력은 오히려 요즘 나오는 미스터리 서적보다 세련되었다고까지 느껴졌다.
태양 빛인지 형광등 빛인지 하얀빛에 정신이 흐릿해진 살인자는 자신을 괴롭혀 온 비밀을 능소화나무 아래 묻어 없애고자 했다. 하지만 그 비밀을 만든 '자신'이 살아있는 한, 능소화나무 아래 묻힌 비밀 또한 목을 조여 오겠지.
누구나 비밀을 가질 수는 있지만 위험한 비밀은 만들지 말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