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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밥 Apr 29. 2021

중국-소련에 낀 ‘새우’ 몽골… 칭기즈칸의 저주와 축복

거대 제국이었던 몽골... 근대사에선 소련-중국에 끼인 ‘새우’

중국으로부터 독립 지켜낸 것도 소련 위성국 영향인 덕분 커

칭기즈칸으로부터 침략받았던 소련-중국의 '칸국 견제'가 원인

그래도 인구 4000만 '지구의 미아' 쿠르드족 보다는 상황 좋아


몽골의 첫 관문은 칭기즈칸 공항이다.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2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이 공항에서 울란바타르 시내까지 들어가는 데엔 차로 약 30분 가량을 달려야 한다. 도로 상태는 매우 불량했다.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차가 왜이렇게 좌우 회전이 심할까?’하곤 차량 앞 유리창을 통해 앞을 봤는데 이유를 알게 됐다. 도로 곳곳이 매우 깊이 파여 구덩이를 피하기 위해 차량이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픽업하러 나온 현지 교민은 “공항까지 가는 도로 공사를 중국 회사가 건설중인데 기술도 속도도 안난다. 겨울 혹한과 여름 혹서를 견디는 것도 관건인데, 여름에 만들었다가 다음해 다시 보수를 해야 할 정도로 패인다. 기술이 부족하다”고 했다.

▶슬픈 역사... 자이승 전망대= 여행 마지막날이었다. 몽골 여행 일정이 모두 마무리 됐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 9시간 가량 시간이 남았다. 숙소 직원에게 ‘가볼만한 곳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며 자이승 전승비를 추천했다. 높이가 많이 높진 않지만 평지인 울란바타르 시내가 모두다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라는 설명도 보탰다. 택시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자이승 전망대’ 또는 ‘자이승 전승비’에 도착했다. 숙소 직원의 말대로 그곳의 전망은 매우 훌륭했다. 자이승 전망대 인근엔 한눈에 봐도 고급져 보이는 아파트들이 건설중이었는데, 한국으로 따지면 ‘강남 개발’ 현장 쯤 돼보였다.

자이승 전승비는 그러나 아픈 몽골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혔다. 몽골이 그나마 ‘우리도 현대사에 등장했었다’는 자위와 함께 승전의 기록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일본과 전쟁을 벌여 승전한 ‘할힌골 전투’다. 그러나 세계사에 할힌골 전투는 소련과 일본의 전쟁으로 쓰여져 있다.

몽골 땅에서 벌어진 할힌골 전투는 양측에서 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전쟁의 주역은 몽골이 아닌 소련이다. 내가 방문했던 자이승 전망대를 만든 주체 역시 소련이다. 자국 땅에서 있었던 대규모 전투의 승전비마저 소련이 만들어준 국가가 몽골이다. 몽골 근대사의 아픔이다. 이후 역사를 보더라도 몽골은 소련의 위성국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이승 전승비를 보고 내려오다보면 한국인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이 있다. 몽골의 마지막 칸 복드칸(Bogdkan)의 마지막 주치의로 훈장까지 받았다는 이태준 선생은 한국에선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몽골에서 그가 훈장을 받은 것은 그의 의술 덕이었다. 그는 몽골에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세웠다.

매독 창궐 때문에 나라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고쳐줬던 분이 이태준 선생이고 그 때문에 그가 훈장을 받았다는 설명이다. 이태준 선생이 활동했던 1920년대 몽골 인구는 고작 100만명 안팎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가운데 60~70%가 매독을 앓고 있었는데 이태준 선생이 이를 고쳤다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어떻게 매독을 고쳤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매독은 난치병이고 한번 앓으면 평생 몸에 흔적이 남는다.

승전의 기록이라고는 하나 몽골의 승전이 아닌 소련의 승전을 기념하는 국가, 사람이 살만한 과거 만주국의 땅(내몽골 자치국)을 죄다 중국에 빼앗겨 버린 국가가 오늘날의 몽골이다. 여기엔 과거 칭기즈칸으로부터 나라를 잃고 노예로 전락했었던 중국의 트라우마와, 중국과는 국경을 맞대고 싶어하지 않았던 소련의 ‘지정학적 필요성’에 의해 존재케 된 국가가 몽골이라는 근대사가 놓여있다.

특히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이 생겨난 연원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칭기즈칸이 나온다. 1200년대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인들을 노예 및 4등 시민으로 대우했던 것이 칭기즈칸이다. 이후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는 북쪽 변방의 말잘타고 활잘 쏘는 오랑캐 몽골인들을 말살시키는 정책을 폈는데, 그것이 바로 매독 보급이었다는 설이 많다. 기록으로는 남아있지 않지만 청나라 말기 매독, 임질 등 성병에 걸린 사람들을 몽골로 귀양을 보냈는데 이는 북방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것이 시초가 돼 1900년대 초 몽골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성병에 걸렸고, 지금도 몽골은 세계 의학연구에서 매독 연구의 ‘성지(聖地)’로 남아있다. ‘매독균을 몽골 우물에 풀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매독의 주요 전파 경로가 성교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물에 매독균을 풀었다는 주장은 다만의 설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라마 불교 승려들이 초혼권을 가져 매독에 걸린 승려들이 매독을 널리 퍼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다. 초혼권이란 결혼을 한 신부와 첫 성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한다.

자이승 전망대가 기념하는 것은 몽골의 승전이 아닌 소련의 승전이고, 자이승 전망대 아랫단에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이 위치한 것은 중국이 선사한 질병 매독을 이겨냈다는 상징물이며, 현재 몽골 인구(320만)의 8배에 이르는 내몽골 자치구를 내땅처럼 차지하고 있는 국가가 중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몽골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 낀 새우 같은 국가다.

몽골은 근대사를 거치며 소련의 문자(키릴)를 사용하며 자국의 문자를 잃어버렸고, 칭기즈칸 공항에서 울란바타르까지 가는 도로를 중국의 손에 맡기고 있다. 걸어온 길 보다 걸어가야할 길이 더 많이 남은 국가가 몽골이다.

▶몽골은 거들뿐… ‘할힌골 전투’= 1900년 이후 몽골 근대사에서 가장 큰 전투는 단연 ‘할힌골 전투’다. 몽골과 소련이 연합해 만주국을 세운 일본의 관동군과 일대 전쟁을 벌인 사건이 할힌골 전투다. 4개월 가량 진행된 이 전투에서 일본은 패했다. 몽골 울란바타르의 외곽에 ‘자이승 전승비’가 세워진 것은 할힌골 전투에서 승전 했던 것을 기념키 위해서다.

할힌골 전투 일본은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전투의 시작은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동아시아에 대제국을 세우겠다며 만주국을 세운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1931년 9월 중국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철도를 폭파하는 자작극(류타오후 사건·만주사변)을 벌인 뒤 이듬해인 1932년 3월 ‘꼭두각시 국가(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당시 만주국 땅의 상당 부분은 몽골국의 영향과 중국의 영향권 내에 있었는데 일본이 이를 일방적으로 합병한 뒤 새로운 국가를 세운 것이다. 새로운 국가는 세웠으나 국경을 둘러싼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할힌골 전투는 몽골이 침략을 받을 경우 소련이 지원한다는 조약을 맺었던 소련·몽골 연합군과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관동군이 싸운 전쟁이다. 일본은 할하강을 기준으로 동쪽이 만주국, 서쪽이 몽골국이라고 주장했으나 몽골은 할하강 동쪽 20킬로미터 지역까지 몽골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기화는 1939년 5월 몽골군 기병 70~90명이 할하강을 넘어 만주국으로 진입하자, 일본 관동군이 이를 불법 월경으로 간주하면서 시작됐다.

만주국을 세운 일본 관동군의 당시 기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만큼 대단했었는데, 심지어 일본왕 히로히토의 명이 관동군에게 먹히지 않을만큼 대단했던 위용을 뽐냈다. 문제는 관동군이 소련을 얕잡아봤다는 데 있다. 당시 일본은 소련이 서쪽으로는 독일과의 전쟁을 치르고, 동쪽으로는 일본과의 전쟁을 치를만큼의 여력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관동군이 소련을 동쪽에서 치더라도 군사적 대응은 상대적으로 미약할 것이라 오판을 한 것이다.

할힌골 전투는 1939년 5월부터 같은해 8월까지 모두 4개월 동안 2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비교적 소규모로 진행됐던 1차 전투는 소련군 1500명과 일본군 2000명 사이의 전투였다. 소련군이 승리했다. 대대적인 공세는 2차 할힌골 전투였다. 1차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항공기를 동원해 소련의 항공기지를 급습해 항공기 100대 이상이 불타는 등의 피해를 입은 소련은 역전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2차대전에서 독일군 격퇴)를 총지휘관으로 투입해 대대적 전투를 준비한다.

일전 일퇴를 반복하던 양쪽 군은 소련군의 사상자 수가 2만5000여명, 일본군 사상자 수가 2만여명에 이를만큼 큰 인명 손실이 난 이후 일본의 패전으로 종지부가 찍어졌다. 주목할 지점은 할힌골 전투가 1년만 늦게 치러졌더라면 일본이 소련을 이길 가능성이 컸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은 투입 병력의 80%를 잃을만큼 대패했는데, 실제 전사자 수를 보면 소련측 희생이 더 컸다. 전투 피해에선 소련이 컸으나 전체 물량 투입이 더 많았던 소련이 결과적으론 이긴 전승사로 기록된 것이다.

1년 뒤에 전쟁이 일어났다면 일본이 이겼을 개연성이 크다고 본 이유는 2차 세계 대전 때문이다. 2차 할힌골 전투가 사실상 일본군의 참패로 종지부가 찍어진 날짜는 1939년 8월 29일로 기록돼 있다. 세계적으론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의 첫 시작인 폴란드를 침공한 날짜가 불과 사흘뒤인 1939년 9월 1일이다. 할힌골 전투가 끝난 직후인 1939년 9월 16일 소련도 폴란드를 침공해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분할 점령했다. 말하자면 ‘소련이 동과 서 두 곳에 전선을 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던 만주국 관동군 장교들의 판단은 결과만 놓고 보면 정확했던 셈이다. 소련은 동쪽 전선에서의 전투가 마무리 되자 서쪽 전선에서의 전쟁을 개시했다.

2차 대전 말기인 1941년 독일이 일본에 ‘소련의 동쪽을 치는 전쟁을 일으켜달라’는 요청에도 일본이 무대응으로 일관했던 이유도 사실은 할힌골 전투에서의 패전 경험이 워낙 쓰라렸기 때문이다. 만약 독일의 요청을 일본이 받아들여 소련이 서쪽에서는 독일과, 동쪽에서는 일본과 전쟁을 치렀다면 소련은 동쪽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주목하기 어려웠을 개연성이 크다. 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에서 독일의 파상공세를 피흘리며 유일하게 맷집으로만 버티던 소련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 지도는 상당부분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

▶중-소에 낀 ‘새우’= 오늘날 몽골의 국경이 획정된 것은 중국과 소련에 의해서다. 2차 세계대전이 끝이 났으니 그냥 기분 좋게 ‘여기까지 소련땅/중국땅/몽골땅’이라고 협정을 한 것은 아니다. 중국과 소련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경마다 크고 작은 국경분쟁이 발생했다. 전바오 충돌과 소련과 중국의 내부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섥히며 분쟁은 상당 기간 이어졌다. 최종 중-소 국경이 확정된 것은 소련 붕괴가 있은지 10년도 더 지난 2005년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전국으로, 중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에 강탈당했던 땅을 되찾는데 집중했다. 이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하고 소련을 견제하던 미국이 내몽골 지역을 중국이 차지하는 것이 맞다며 편을 들면서 오늘날 내몽골 지역은 중국에 편입돼 버렸다.

몽골인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내몽골 역시 몽골국이란 주장을 내놓는다.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가 중국에 편입된 것은 청나라 때다. 이후 모택동이 내몽골에 들렀을 때 추후 자치구로 인정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면서 1947년 5월 1일 내몽골은 중국의 최초 자치구로 편입되게 된다. 몽골인들의 바람과는 달리 내몽골 자치구 거주인들은 외몽골로 분류됐던 오늘날의 몽골에 대해 별다른 ’동질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세계 최강대국 반열에 오른 중국의 자치구민으로 살면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GDP규모 세계 130위인 몽골 국민으로 사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다.

오늘날 몽골이 한반도의 10배 넘는 거대한 땅을 차지하게 된 것도 사실은 몽골의 지정학적 위치가 선사한 선물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두 나라의 국경이 맞닿아 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우려했고, 이 때문에 완충 역할을 할 방파제로서 몽골의 가치를 높게 봤다. 몽골은 소련과 중국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국가 성격이 짙다. 만일 소련의 영향 하에 몽골이 있지 않았다면 오늘날 몽골은 내몽골 자치구처럼 중국의 일부가 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듯 다른… 쿠르드족 vs 몽골족= 유목민, 분할, 자치국, 변방, 민주국가. 이 다섯가지를 공통 분모로 하는 몽골족 외 또다른 민족이 바로 쿠르드족이다. 다만 몽골과는 달리 쿠르드족은 유목민 특유의 속성으로 인해 세계 어느 곳에서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몽골처럼 소련과 중국의 국경분쟁을 막는 방파제 역할로라도 쓸모가 있었다면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겠으나, 민족-종교-언어 등으로 복잡하게 섥힌 중동의 역사는 쿠르드족이 나라를 세우는 것을 방해했다. 오늘날이라도 쿠르드족이 단결해 가자흐스탄처럼 ‘쿠르디스탄(가칭)’ 국가를 세우면 어떨까. 그러나 여러 국가로 나뉘어진 채 오래 살다보니 이젠 쿠르드족 내에서도 이견이 커지며 쿠르드족 독립국가는 성립이 어렵게 됐다는 것이 현실적인 분석이다.

전세계적으로 쿠르드족은 단일 민족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이들은 중세시대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살던 유목민족인데 그 숫자는 4000만명~4500만명에 이른다. 쿠르드족은 2차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에 국경이 획정되면서 한 곳에 몰려살던 이들이 여러 국가로 나뉘어져 살게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쿠르드족은 오늘날 터키와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 모두 4개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이다. 그들은 쿠르드어를 사용하고 대부분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4000만명이 넘는 쿠르드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는 터키에 살고 있는데 대략 1500만명이 터키 동남부 지역에 거주중이다. 터키 입장에선 이들 쿠르드인들은 골치거리다. 터키의 국가적 숙원 사업 가운데 하나는 유럽연합(EU) 회원국에 편입되는 것인데, EU측은 터키가 쿠루드인들에 대한 억압정책을 펴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EU 가입을 불허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란에는 800만명 가량의 쿠르드인이, 이라크에는 600만명, 시리아에는 200만명 가량의 쿠르드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이들 쿠르드인들이 쉽사리 해당 국가에 복속되지 않고 유목민 특유의 독자적 생존방식을 고수하면서 각 국가의 동화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큰 틀에서 보면 쿠르드인들은 한 민족으로 분류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도 남을만큼 인구수가 많지만, 최근엔 민족을 중심으로 한 독립국가 형성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유는 쿠르드족 내부에서도 이해 관계가 달라지는 양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터키에 거주중인 쿠르드족은 시리아 거주 쿠르드인들에 비해 경제형편이 훨씬 나은데, 향후 쿠르드 국가로 편입될 경우 누려왔던 경제적 지위를 상실할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쿠르드족 출신으로 이라크의 대통령이 된 잘랄 탈라바니는 그러나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였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에선 이명박 대통령이 이라크와 유전개발 MOU를 체결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는데, 정작 이라크 내 언론들은 “이명박의 행위가 이라크 내 연방정부와 쿠르드자치정부간의 관계를 악화시켰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쿠르드족은 중동 정치 내에서 여러 국가들로부터 이용만 당하고 버림받았던 전례가 많았던 민족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쿠르드족은 ‘영국을 도우면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게 하겠다’는 영국측의 말을 믿고 전쟁에 참가했지만 결국 영국으로부터 배신당했다. 약속했던 독립국가 지원은 지켜지지 않았다. ‘지구의 미아’, 비운의 쿠르드족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영국이 최초 원인 제공국가다.

쿠르드족은 세기의 깡패국가 ‘이슬람 국가(ISIS)’를 물리치는데에도 쿠르드족은 힘을 보탰다. 이유는 명확했다. 민족의 숙원이었던 독립국가를 만드는 데에는 세계 열강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쿠르드족 민병대 ‘인민수호부대(YPG)’는 ISIS의 본거지 락까(시리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1만1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YPG가 이렇게 대규모 전쟁에 참가한 것은 미국의 요청 때문이었고, 이는 곧 쿠르드 자치국가 설립에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다. 또 한번의 배신이다.

쿠르드족 탄압은 뉴스의 단골 소재다. 이들이 있는 국가엔 항상 쿠르드족의 염원인 ‘독립국가’의 분위기가 흐르고 이는 각국 정부에겐 항상 위험 요인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유화책으로 때로는 강경 진압책으로 쿠르드족들을 눌러왔던 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쿠르드인들이 각 국에서 겪고 있는 현실이다.

칭기즈칸의 연도별 세력권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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