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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밥 May 04. 2021

학살자와 영웅 사이… 칭기즈칸은 어떻게 사라졌나

칭기즈칸, 몽골 역사서에서 사라져

몽골 정치인들 대다수 친소련파

게임과 영화의 '오크'는 몽골군이 원본

100만명으로 2억명을 지배했던 사람.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가 정복했던 땅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했던 사람. 어렸을 땐 개를 무서워 했던 사람.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천하를 얻는 것이라 말한 사람. 적을 융숭히 대접했던 사람.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사람. 머리를 굽히는 사람에겐 그에 맞는 지위를 줬던 사람. 머리를 굽히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한 사람. 역사상 가장 넓은 땅(777㎢)을 지배했던 칭기즈칸에 대한 이야기다.

▶칭기즈칸의 소멸= 칭기즈칸이 몽골의 역사 교과서에 다시 등장한 것은 20~30년 가량 밖에 되지 않았다. 현재의 몽골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이 몽골에 대한 극심한 견제를 수백년간 해왔기 때문이다. 구 소련 지배 하 몽골의 역사 교과서엔 칭기즈칸이 세웠던 대제국의 역사 기록이 없다. 칭기즈칸의 군대에 의해 나라를 잃어버린 채 4등 시민이 됐었던 중국은 칭기즈칸의 역사를 굴욕의 역사로 규정하고 몽골을 ‘우매한 나라(몽고)’라고 불렀다. 유럽에서도 칭기즈칸은 금기어에 해당했다. 

게임에도 곧잘 등장하는 괴물 ‘오크(Orc)’는 몽골군이 원본이다. 몽골로부터 피해를 입었던 유럽인들은 그를 ‘학살자’로 칭했다. 유럽 각국의 최고의 전쟁영웅들이 몽골의 군대에 의해 박살이 나자 몽골군에 ‘죽음의 군대’라고 불렀다.

훈족 아틸라가 유럽을 정벌했고, 몽골족 칭기즈칸이 다시 그의 뒤를 이었다. 소련과 중국의 견제는 거의 800년 동안이나 칭기즈칸을 자국의 역사서에서 소거시켰다. 칭기즈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구 소련 몰락 후에 와서였다. 몽골의 초대 대통령들이 죄다 소련 유학파 출신들로 채워졌고, 칭기즈칸 조형물을 만들었던 예술가들이 몽골 법원에서 10년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은 소련과 중국에 의해 칭기즈칸의 역사가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상징하는 사안으로 평가된다.

칭기즈칸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몽골 독립 이후다. 구 소련이 1990년대 붕괴한 이후 몽골은 대대적인 칭기즈칸 기념사업을 벌였다. 울란바타르로 들어가는 공항 이름을 칭기즈칸 공항으로 이름을 바꾸고, 몽골 화폐 단위 투그릭의 모든 지폐에 칭기즈칸 초상화를 넣었으며, 칭기즈칸이 태어난 다달솜에 칭기즈칸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설치된 것도 소련으로부터 독립된 이후 몽골이 독자적으로 실행에 옮긴 기념 사업 중 하나다. 소련의 방해는 적지 않았다. 몽골에 남아있던 친소련계 인사들이 몽골이 칭기즈칸을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발현 하는 것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소련이 왜 칭기즈칸의 영웅화를 막아섰는지에 대한 해답은 역사에 나와있다. 소련은 모스크바를 필두로 한 깁차크 한국의 지배를 250년동안이나 받았다. 눈이 찢어지고 덩치가 작으며 힘이 장사인 몽골 제국 병사들에 의해 지배를 받았던 시기가 유달리 길었던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긴 기간 동안 통치를 받았던 국가가 바로 소련이다. 킵차크 한국은 1237년 바투칸을 시작으로 1499년까지 이어졌던 소련을 지배했던 몽골 제국의 한 분파다. 몽골 제국의 크기가 워낙 컸기에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도 한동안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 사이 몽골 정통성을 두고 전쟁을 벌였던 역사가 킵차크 한국의 역사로 남아있다.

중국은 더하다. 송나라가 멸망한 것이 칭기즈칸에 의해서였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은 1271년 북경을 수도로 하고 원나라를 세웠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혜종이 한족 주원장에 의해 북쪽 몽골 고원으로 쫓겨나기 전인 1368년까지 중국을 다스린 제국이다. 한번 세를 규합하면 짧은 시간 내에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봤던 중국은 청나라 시절 몽골을 중국 역사의 일부로 흡수했고, 이후엔 ‘우리 칭기즈칸이 유럽을 정벌했다’고 가르쳤다. 실상은 칭기즈칸에 의해 국가가 멸망한 역사가 바로 원나라 시기였는데도 말이다.

▶상인의 감각을 가진 세계 최대 정복자= 유목민 출신 칭기즈칸이 정복한 땅은 777만㎢에 이른다. 알렉산더(348만㎢)와 나폴레옹(115만㎢), 히틀러(219만㎢)가 지배한 지역을 다 합쳐도 칭기즈칸이 지배했던 땅의 넓이에 못 미친다. 그럼에도 알렉산더에 대해 우리는 ‘대왕’이란 호칭을 붙이고, 나폴레옹은 대단한 프랑스의 장군이자 후대엔 황제가 된 인사로 배운다. 나폴레옹이 실제로 했던 말인지도 미심쩍은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과 함께다. 지배했던 땅의 넓이와 지배했던 인구를 더하고, 여기에 수백년 동안 이슬람-칸의 문화가 유라시아 곳곳에 사회‥문화 흔적으로 남아있음에도 칭기즈칸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평가가 박했던 것이 사실이다.

칭기즈칸이 서역 정벌에 나선 것은 무역 요청이 좌절되면서였다. 칭기즈칸이 동쪽의 최대 세력이었던 금나라를 굴복시킨 뒤인 1216년 칭기즈칸은 호라즘 왕국 무하마드2세에게 200명 규모의 사절단을 보냈다. 신생제국의 황제 무하마드2세에게 통상 요구를 위해서였다. 호라즘 왕국은 신생 제국이었으나 동서양의 무역로를 장악한 왕이었다. 문제는 칭기즈칸이 보냈던 사절단 대부분이 스파이로 몰려 모두 참수 당했고, 이에 격분한 칭기즈칸이 호라즘 정벌에 나선다.

호라즘은 오늘날로 치면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에 위치한 곳으로 주요 도시로는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이 있다. 이들 도시들은 실크로드 상에 있으며 당시 동서 무역의 핵심 도시로 나날이 번성하고 있던 곳이다. 칭기즈칸이 호라즘 정벌에 동원했던 군대의 규모는 15만명 안팎이다. 모하메드 2세의 군대는 약 40만명 가량이었다. 관건은 모하메드의 군대 40만명이 군주의 완벽한 군대라기 보단 귀족 세력들의 지휘를 받는 분할된 군대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각 귀족 휘하의 군대는 도시 방어를 위해 분산돼 있었고 이 때문에 몽골군에 의해 대부분이 각개 격파 당하게 된다.

호라즘 왕국의 최종 도시이자 무하마드2세가 거주중이었던 사마르칸트는 가장 마지막 공격 대상이었다. 칭기즈칸 고유의 독특한 공성전 기법은 이곳에서도 발휘되는데, 성에서 뛰쳐나와 공격을 하면 짐짓 놀란 척 후퇴를 하고 이후 적의 공격 대열이 늘어지면 기병의 기동성을 활용해 적을 섬멸하는 방식이다. 단 한번의 유인-포위 작전으로 적 병사 5만명을 학살했다. 이후 불과 5일만에 사마르칸트는 몽골군에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최초 목적이었던 무하마드2세는 잡지 못했는데, 칭기즈칸은 자신이 가장 믿는 제베와 수부타이를 시켜 무하마드 2세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이 오늘날의 폴란드-헝가리-오스트리아-러시아 등 동유럽 일대를 몽골군이 휩쓰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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