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떠난 느린 시간들(24화)
숙소에 도착하자 조금 전에 넣었던 오토바이 기름이 떠올랐다. 왠지 더 돌아다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만동, 한국 돈으로 560원 정도를 더 넣었으면 어땠을까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이 남았다. 이곳에서의 시간도 그렇게 조금씩 아쉬움으로 쌓여가고 있었다.
시장에서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한 뒤 아이들에게 바닷가에 가자고 제안했다. 예준이는 할머니와 숙소에서 탁구를 치고 싶다 했고 예온이는 선뜻 따라나섰다. 예온이와 오토바이를 타고 바닷가로 향했다. 오늘은 중동 사람들 몇 명이 바닷가에 앉아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예온이와 함께 어제처럼 모래를 파고 성벽을 쌓았다. 예준이가 없어서인지 즐거움이 조금 덜했다. 역시 함께 노는 시간이 아무리 정신없어도 더 재미있고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예온이도 형이 없는 빈자리를 느끼는 듯했다. 그렇게 오래 놀지는 못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오토바이에 가족을 태우고 다니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계산을 하다 보니 몸은 축 늘어지고 마음도 지쳐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데 엄마가 쌀국수를 만들었다며 내려오라고 하셨다.
사실 그냥 “안 먹을게요” 한마디면 됐을 일인데 그 말 대신 괜한 짜증이 튀어나왔다.
“엄마, 저녁시간에 같이 먹자고 했잖아요. 갑오징어도 있고 김치찌개도 있는데, 지금 국수 먹으면 저녁은 어떻게 먹어요?”
말을 하고 나서도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화는 나버린 뒤였다. 아내도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며 나를 나무랐다. 나 역시 엄마가 시장에서 사 온 재료로 뭔가 해보려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피곤함은 내 감정을 쉽게 통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다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여행 준비 중 아이들 공부책을 가져오지 못한 것이 처음에는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나날을 지내보니 과연 공부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학을 조금 더 한다고 영어 단어를 몇 개 더 외운다고 삶이 달라질까?
어릴 적 나도 공부 열심히 했지만 결국 지금 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 노력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준 걸까. 그저 지금처럼 평화롭고 웃음 가득한 시간을 살아가는 게 더 소중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마음속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평온함 속에서 문득 한국으로 돌아가면 또 다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할 내 모습이 떠올랐다. 경쟁 사회에서 남들보다 뒤처질까 두려워 아이들을 몰아붙이고 또 스스로를 몰아붙일 내 모습. 그것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지 이곳에서는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아갈 수는 없을까? 오토바이 렌탈 사업, 작은 식당, 에어비앤비… 하지만 곧 현실이 떠올랐다. 최근 다낭과 호이안의 한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여행지는 점점 바뀌고 있었다. 사업은 녹록지 않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삶을 꿈꾸는 마음은 여전히 내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 쉬고 나니 마음도 가라앉았다. 다시 저녁 준비를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꺼내지 못했지만, 대신 이렇게 물었다.
“쌀국수 드셔서 저녁 괜찮으시겠어요?”
그 말에 엄마는 “맛없더라 얼마 안 먹었어”라며 웃으셨다. 그 한마디가 마음을 조금 놓이게 했다.
아빠는 또 나무를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계셨다. 벌써 세 번째 피운 불이었지만 오늘 불꽃은 유난히 잔잔하고 따뜻했다. 고기, 오징어,고구마 굽기 모두 딱 좋은 불이었다.
엄마가 손질해 주신 갑오징어를 철판에 굽고 고구마는 은박지에 감싸 화로에 넣었다. 예온이도 눈을 반짝이며 오징어를 바라봤다. 삼겹살이나 생선이 있었다면 더 풍성했겠지만 갑오징어만으로도 충분했다. 엄마는 등갈비 김치찌개까지 내오셨다. 그 순간 잔불 위에 둘러앉아 가족과 나누는 한 끼가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후식으로 꺼낸 고구마는 어제보다 더 비싼 값을 지불해서인지 더 달고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입안 가득 퍼지는 달큰함, 따뜻한 화로의 온기, 그리고 그 옆에 앉은 가족들의 미소—그 모든 것이 이 숙소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하늘 위에는 달이 밝게 떠 있었다. 선선한 밤공기, 따뜻한 불빛, 잔잔한 대화. 아쉬움이 밀려오는 밤이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 그러기에 더 여운이 짙었다. 평범한 저녁이었지만, 마음에는 오래도록 남을 따뜻한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