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사라고 하면 어렸을 때부터 역사에 빠진 역사 덕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사건의 연도를 꿰고 있고 어려운 역사 용어와 명칭을 오타 없이 곧바로 대답하며 역사적 인물의 업적을 줄줄 외우는 사람. 바로 당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런 거까지 외우고 있어’라고 생각한 그런 사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선언(?)하지만 역사에 그렇게 깊이 빠지지 못했다. 역사라는 바다에 깊이 들어가 숨이 차오를 때까지 유영하고 싶다가도 다른 더 재밌는 것에 관심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질리지 않고 역사를 업으로 삼고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역사 덕후는 아니었지만, 한글을 배우고 책 읽는 재미에 빠졌을 때 내 손에는 한국사 만화 전집과 삼국지가 들려있었다. 역사가 가진 이야기(Story)의 힘에 나는 저항 할 수 없었다. 단군신화와 고조선의 건국, 삼국의 건국 신화, 신라 김춘추와 김유신의 활약 등 지금 생각하면 역사를 사극 드라마처럼 받아들였던 게 아닌가 싶다. 좋아하는 등장인물을 응원하며 결과를 알고 싶어 본방 사수하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런데 역사를 좋아한 것 치고 박물관을 가거나 문화재를 관람하는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없다.
내가 살던 청주의 중심 상업지구에는 길쭉하게 높이 솟은 전봇대같이 생긴 조형물이 있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만날 때면 으레 그곳이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그 조형물이 철당간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꽤 지나고 알게 되었고 철당간이 불교 사찰과 관련된 조형물이라는 것을 안 것은 더 한참 뒤에 일이었다.
역사의 이야기는 눈과 귀를 사로잡았지만 정작 역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문화재에는 ‘1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박물관에 가면 문화재를 보는 것보다 관람이 끝나고 먹을 점심이 더 중요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내게 문화재는 점심 메뉴보다 못한 존재인가? 단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문화재를 볼 때면 공상에 빠져버린다.
‘어느 시대 것일까?’, ‘왜 만들었을까?’, ‘어떤 기능을 한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문화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보충해 주기도, 반전을 주기도 하며 큰 즐거움을 주었다. 문화재를 통해 역사는 비로소 현장감과 생동감을 얻고 2D에서 3D로 진화할 수 있었다. 그 활용에 따라서는 4D까지도 가능하리라. 내가 문화재의 가치를 몰라봤던 것은 문화재에 담긴 이야기를 몰랐기 때문이다. 당간이라는 것이 사찰의 의식을 알리는 깃발을 거치하는 조형물이고, 철로 만든 철당간은 화재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고려 광종 때 호족(지방 유력자)들이 건립하였음을 알려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철당간 주위로 고려 시대 찬란했던 불교 문화의 발전상이 어른거리게 되었다.
문화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연예가 중계’와 ‘한밤의 TV 연예’를 본 세대라면 연예인을 상대로 리포터들이 인터뷰하는 장면을 많이 봤을 것이다. 인터뷰를 통해 연예인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은 리포터의 능력에 달려 있다. 인터뷰 대상에 대한 관찰, 사전 지식과 정보는 다양한 질문으로 연결되고 질의응답의 과정에서 그 대상은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게 된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그나마 알게 된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합리적인 추론에 필요한 단서는 얻을 수 있다. 문화재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닿아 있을 때 유네스코(UNESCO)와 만나게 된다.
보편적 가치라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며 근본적인 것으로 보는 가치를 말한다.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 문화재 중에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들이 있다. 나는 등재 이유가 궁금해졌다. 유네스코는 한국 문화재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유네스코는 문화유산 등재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출처: 유네스코와 유산)
Ⅰ.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Ⅱ.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Ⅲ.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Ⅳ.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Ⅴ.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
Ⅵ.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
* 모든 문화유산은 진정성(authenticity; 재질, 기법 등에서 원래 가치 보유) 필요
별도로 첨부된 진정성(authenticity)은 당시의 원형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에 대한 평가 척도라고 보면 된다.
현재 2020년 12월 기준 등재된 한국의 문화유산과 등재 기준은 다음과 같다. (출처: 유네스코와 유산)
1. 경주역사유적지구(Ⅱ, Ⅲ)
2.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Ⅲ)
3. 남한산성(Ⅱ, Ⅳ)
4. 백제역사유적지구(Ⅱ, Ⅲ)
5.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7개 불교 사찰, Ⅲ)
6. 석굴암과 불국사(Ⅰ, Ⅳ)
7. 조선 왕릉(Ⅲ, Ⅳ, Ⅵ)
8. 종묘(Ⅳ)
9. 창덕궁(Ⅱ, Ⅲ, Ⅳ)
10. 한국의 서원(Ⅲ)
11.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Ⅲ, Ⅳ)
12. 해인사 장경판전(Ⅳ, Ⅵ)
13. 화성(Ⅱ, Ⅲ)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도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지만,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은 제외하였다.
유네스코는 한국의 문화재를 살펴보고 위와 같은 기준의 등재 이유를 밝혔다. 한국의 문화재로부터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발견하고 보호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 등재된 한국의 문화재는 우리가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들이다. 문화재의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을 뿐이지 문화재는 언제나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는 아직도 다 듣지 못한 문화재의 이야기가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래서 재미있다. 다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기존 문화재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지만, 옆(?)그레이드로 끝날 가능성도 크다. 현재의 사고 수준으로는 더 큰 가치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가성비를 따졌을 때 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하는 기존 문화재를 붙잡고 있기보다는 새로운 문화재를 만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트렌디한 영화에 신인 배우가 등장했을 때 그 느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문화재를 발굴하는 것은 다양성의 관점에서도 확실히 이득이다. 발굴 문화재는 곧 매장문화재를 말하는데, 땅속에 잠들어 있는 문화재라 볼 수 있다. (물속에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는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매장문화재 유존지역(매장문화재가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지역)을 훼손하지 않도록 원칙적으로는 조사·발굴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구·유적 정비나 건설공사 시 예외적으로 문화재 발굴과 조사를 시행한다. 포털사이트에서 ‘XX 시대 왕릉급 무덤 발견’, ‘청동기 시대 유물 수십 점 쏟아져 나와’ 등의 머리기사가 나타난다면 대부분은 매장문화재 발굴 결과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한 번이라도 클릭해서 본 적이 있는가? 직업이 역사 교사다 보니 발굴 관련 기사는 꼼꼼히 챙겨 보는 편이다. 사실 전문 발굴 기사는 대중들이 보기에 괴랄 할 수 있다. 원형봉토분, 횡구식석실, 단각고배 등의 고고학 한문 용어들은 의학 전문 기사에 나오는 용어만큼이나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새로운 문화재 발굴에 고고학자들은 희열에 차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 대중들의 반응은 차가울 수밖에 없다. 이 온도 차를 줄이는 것이 역사 교사의 역할이기에 발굴 기사를 접하는 마음이 복잡해진다. 어쨌든 바쁜 현대인에게 매장문화재는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고고학자와 건설공사 시행사들에 매장문화재는 늘 중요한 이슈였다. 물론, 바라보는 관점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매장문화재에 담긴 몇 가지 이슈들을 이야기해 볼까 한다.
매장문화재 발굴은 크게 학술발굴과 구제발굴로 나뉜다. 연구와 자료수집, 유적지의 정비 및 복원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학술발굴이다. 건설공사·토지개발로 인해 훼손의 운명에 처한 문화재를 구제하는 경우는 구제발굴이다. 학술발굴보다 구제발굴이 5~6배 정도로 많은 편이기 때문에 방송이나 뉴스에 나오는 매장문화재 발굴은 대부분 구제발굴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건설공사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신도시 개발이 얼마나 많은지 알 것이다.
매장문화재 발굴의 시작은 지표조사라 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땅 위에 나타난 유적·유물·지질·생태 등을 조사하는 것이다. 법률에 따라 3만 제곱미터 이상의 건설공사는 의무적으로 지표조사를 시행하여야 한다. 그 이하의 규모라도 지방자치단체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시행할 수 있다. 조사의 필요한 비용은 건설공사 시행자가 부담하는데, 경우에 따라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지표조사를 통해 유존지역으로 확인되면 표본조사(조사 대상 면적의 2% 이내) 또는 시굴 조사(조사 대상 면적의 10% 이내)한다. 이제부터는 땅을 파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문화재가 발견되면 정밀발굴조사가 진행된다. 우리가 미디어를 동해 접하는 발굴 결과는 바로 이 정밀발굴조사에 따른 것이다.
그러면 이제 발굴 과정을 다시 돌아가 보자. 지표조사를 하는 것은 건설공사 규모가 3만 제곱미터 이상일 때다. (3만 제곱미터는 축구장 4개를 합친 크기와 비슷하다) 그 말은 이 규모보다 작은 건설공사는 지표조사를 받지 않고 그대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 건설공사에서 3만 제곱미터 미만의 건설공사가 대부분의 차지한다는 통계 자료를 볼 때 마음 한편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다. 문화재 조사의 사각지대가 상상 이상인 것이다. 그동안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그대로 땅에 묻혀 버린 문화재가 대체 얼마나 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특히 전적으로 유물·유적에 의존해 실상을 밝혀야 하는 선사시대 유적지가 훼손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아깝다. 보존을 떠나서 기록으로라도 남겨놔야 후대에 연구가 가능할 텐데 그런 기회조차 없는 실정이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와 삼국 건립 이전의 역사는 기록의 부족으로 사실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그나마 고조선의 역사가 중국 사서에 등장하고 있지만, 중국이 자국을 중심으로 하여 변두리 역사로 기록하다 보니 안개 속의 실루엣과 같다. 이 시기 역사는 어쩌면 우리 민족의 근원을 찾는 과정일 수 있는데 법의 사각에서 난개발로 인해 불분명해지고 있다.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할수록 몇 개의 자료로 추론을 해야 하고 확대 해석과 이를 경계하는 세력 사이에 역사 논쟁이 붙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우리나라 고대사를 두고 치열한 다툼은 그칠 줄 모른다. 자료가 부족한 고대사를 일반화하고 확대 해석하여 ‘사이비 역사’ 논쟁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소모성 논쟁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진실의 이야기’를 들려줄 문화재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3만 제곱미터 미만의 중·소규모 건설공사에 대한 현재의 조치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중·소규모 건설공사에도 최소한의 지표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시간과 비용이 문제라면 기존 지표조사를 약식으로 적용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만하다. 문화재가 존재한다는 약간의 가능성이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조사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세금은 이런 곳에 쓰여야 한다.
제도 마련과 함께 지방자치단체장의 문화재 보존에 대한 의지도 중요하다. 지표조사에 대한 의무가 없는 중·소규모 건설공사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장의 모니터링이 있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자문위원회를 두고 전문성을 발휘해 문화재 조사에 대한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지역 산업 발전과 주택 문제가 문화재 보존과 상충한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서로 어우러져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화재만 한 관광 상품도 없으며, 문화재를 활용한 역사 공원 조성은 주택의 공급에 큰 영향을 주지 않고 질 높은 거주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문화재 개발에 대한 공감대와 긍정적 여론 형성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천 의지만 있다면 문화재를 활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다.
이렇듯 매장문화재가 발굴되기까지 과정이 녹록지 않은데, 발굴된 이후 관리와 유지는 더욱 험난하다. 매장문화재 보존 문제는 실질적으로 대중이 매장문화재를 접하고 즐기는 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으므로 상황에 따라 전략적인 방법을 심도 있게 구상해야 한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발령 대기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별다른 일 없이 백수처럼 지내고 있는 내게 발굴 현장의 선배가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어서 고민하지 않고 발굴 아르바이트를 덥석 물었다. 발굴에 대해 순백에 가깝게 무지했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발굴 현장은 생각했던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뜨거운 한여름의 타는듯한 태양 아래 허리를 구부린 채 호미질과 삽질을 하다 보면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모래 먼지가 온몸을 휘감고 지나가기 일쑤였다. 반복적인 호미질과 삽질로 시공간의 감각이 희미해질 무렵 깊은 한숨만이 황폐한 발굴 현장을 감돌고 있었다. 실제 문화재 발굴 현장은 공사장과 흡사하다. 유의미한 흔적이 나타날 때까지 각종 장비를 동원하여 땅을 깎고, 파고, 엎고 하는 과정이 대부분이라 고고학(考古學)자보다는 고(高)노동자의 느낌이 강했다.
발굴 현장은 산업 단지 예정지였는데 조선 시대 무덤과 도요지(도자기를 굽는 가마 유적)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불에 검게 그을린 찌꺼기와 함께 깨진 도자기 파편들이 나왔기 때문에 단순 일꾼에 불과했던 내가 봐도 도요지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유적지는 어떻게 되나요”
라는 질문에 선배 조사원은 무심하게 답했다.
“사진 찍고, 유물 수습하고, 보고서 쓰고... 뭐 그런 거지”
보존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발굴 현장에 끝까지 있지 못해 그 뒤의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관련 뉴스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건설공사가 그대로 진행된 것 같다. ‘적어도 가마터 주변의 그을린 구역은 보존하겠지’라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산업 단지가 들어선 곳에 도요지의 흔적은 전혀 없을 것이다. 아마 안내판조차 없을 가능성이 크다. 애써 힘들게 찾은 매장문화재가 아직도 땅속에 있지만 이제 그것을 다시 꺼낼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녀석은 ‘형체를 갖춘 보존’이 허락되지 않았다.
매장문화재는 문화재청의 심사를 거쳐 원형 보존, 이전보존, 기록 보존 중 하나의 조치를 받는다. 원형 보존은 문화재가 발견된 위치에 본래 상태로 보존하는 것을, 이전보존은 문화재를 전시관이나 다른 장소로 옮겨 보존하는 것을 말한다. 원형 보존이나 이전보존은 문화재의 형체가 남아 있게 되고 대중들이 직접 문화재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나은(?)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록 보존은 발굴 조사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후 건설공사가 그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문화재는 사라지게 된다. 매년 수천 건의 지표·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중 원형·이전보존의 조치를 받는 문화재는 수십 건 안팎이다. 대부분의 문화재는 기록만 남긴 채 건물과 도로 바닥에 다시 잠들고 만다. 기록으로라도 남긴 것이 어디냐고 할 수 있겠지만 문화재의 못다 한 이야기, 밝히지 못한 이야기, 다양한 가치를 알기 전에 너무 급하게 대화를 끝낸 것은 아닌지 안타까움이 크다. 가성비 만능 사회에서 현실적인 개발과 비용 문제로 ‘형체’를 빼앗긴 문화재 중에는 후대에 더 큰 가치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들도 있지 않았을까.
사진과 영상으로 문화재 본체가 가진 정보를 모두 알 수 없다. 시각적 요소(시각적 요소마저도 사진과 영상을 통해 왜곡된다)만 어느 정도 파악될 뿐, 문화재의 나머지 관찰 요소들은 사실과 멀어진다. 문화재 내부의 상태, 재질, 감촉, 냄새, 두드림 등 관찰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는 본래 형체가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등재 기준에 진정성(authenticity)을 필수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문화재를 지상에 남겨 둘 수는 없다. 하지만 최대한 남겨 둘 수는 있다. 지표·발굴 조사에 따른 문화재 원형·이전 보존의 비율이 너무 낮다. 원형에 가깝고 훼손이 덜한 문화재를 최소한으로 추려서 보존할 방안을 찾았으면 한다. 문화재청·지방자치단체장·건설공사 시행사가 협력하여 행정과 재정을 분담해야 할 것이다. 이도 저도 힘들다면 적어도 주차장 한쪽에라도 장소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문화재 발굴과 보존은 현실적인 조건과 부딪힌다. 결국은 가성비를 쫓는 과정에서 많은 문화재가 탈락한다. 문화재 발굴과 보존보다 당장 개발이 큰 이득을 준다는 인식은 결국 문화재의 ‘상품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재도 눈에 띄는 효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문화재의 활용이 중요해졌다.
매장문화재는 발굴 조사 후 보존 조치가 내려지면 문화재 유형과 상태,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보존 방법을 결정한다. 발굴된 상태 그대로를 드러낸 채 강화유리 등의 보호시설을 설치하여 보존하는 방법과 복토(발굴한 집터, 무덤, 건물터 등 구조물을 흙으로 덮어 보호함) 후에 다양한 시설(식물, 돌 등)로 위치를 알리고 안내판을 설치하는 방법이 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는 복토 과정이 중요하지만, 실제 문화재를 접하는 대중으로서는 잔디나 돌로 덮여 있는 모습은 문화재 관람의 흥미를 떨어트린다. 아무리 안내판에 설명이 잘돼 있다 하더라도(실제로는 설명도 부족한 경우가 많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보존 방법 중 전시관·박물관을 세우고 발굴된 문화재를 전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이다. 전시관·박물관은 관람에 대한 편의를 효과적으로 제공하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연계할 수 있어 교육 활동과 궁합이 잘 맞는다. 무엇보다 실내 관람은 기후의 영향을 적게 받아 적합한 관람 환경을 제공한다. 일정한 구역을 역사 공원으로 조성하는 방법도 있는데 문화재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오락·놀이·휴식의 공간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최근 주목받고 있다.
글을 준비하면서 경기도의 모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박물관은 박물관과 역사 공원이 결합 된 형태로 매장문화재를 보존하는 곳이었다. 4~5세기 백제 및 고구려 무덤과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전 복원된 무덤들이 발굴 상태 그대로 드러나 있어 현장감이 대단했다. 학교에서 삼국시대 무덤 양식을 가르칠 때 다양한 사진·그림·동영상 자료를 제시하지만, 항상 한계를 느꼈다. 원형 그대로의 무덤을 직접 관람하는 것은 무덤이 가진 정서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한다고 전달될 수 없는 영역이다. 무덤 벽을 구성하는 돌이 하나씩 보면 투박하고 제멋대로지만 쌓아놓은 전체를 보면 그 안에서도 질서와 균형이 있음을 느낀다. 무덤 안 유해가 있었던 자리를 표시하는 경계석을 통해 엄숙함도 느낄 수 있다. 벽, 천장, 입구가 명확히 구분되는 무덤의 구조는 상상력을 북돋아 머릿속에 무덤을 만드는 사람이 열댓 명 나타난다. 이 모든 것들이 문화재 원형이 가진 힘이라는 것을 박물관 전시를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박물관에는 야외에 작은 규모의 역사 공원이 조성돼 있었다. 한겨울이라 말라 있었지만 다른 계절에는 공원을 가로질러 흘렀을 인공 냇물이 눈에 띄었다. 몇 개의 벤치가 있었고 무덤 2기가 복토 후 정사각형 돌들로 덮여 있었다. 실내 전시관 이상의 현지 복원을 기대했던 나는 살짝 실망했다. 무덤 2기가 있다고 표시된 곳은 무덤의 위치와 규모만을 알 수 있게 복토되어 있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안내판이 덩그러니 있었다. 안내판의 사진은 비에 젖었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공원 한편의 돌조각상에 새겨진 OO역사공원이라는 이름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역사 공원이라 하면 가벼운 산책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벤치에서 커피 한잔하면서 역사적 호기심과 미적 감각을 끌어 올릴 수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그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역사 공원은 일반적인 공원의 기능이라 할 수 있는 휴식, 운동, 오락, 놀이 등이 충분히 제공되고 여기에 더하여 문화재를 활용해 역사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역사에 관심이 없다. 한국사 시험을 위해 교과서를 달달 외웠던 사람들에게 역사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빠르게 사라지는 휘발성 과목이다. 힘들게 밤새워 외우고 약간의 기대까지 하고 시험을 보지만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괴팍한 과목말이다.
주민들이 공원을 찾는 이유는 휴식과 오락을 위해서다. 그들에게 역사 공원은 역사 공부를 하러 오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놀러 온 김에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역사를 체험하고 즐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공원에서 문화재는 교육이 아닌 즐길 거리로 제공됐으면 한다. 실제 신석기 토기를 관찰하고 토기를 만들 수 있는 체험장, 신석기 주거지를 북카페로 만들어 움집에서 아메리카노 함께 책 한 권을 보는 여유, 발굴 현장을 보존해 놓고 바로 옆에 작은 규모의 발굴 현장을 재현하여 아이들이 발굴 놀이를 할 수 있게 하는 등 매장문화재를 활용한 체험형 역사 공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여가가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테마와 특색을 갖춘 다양한 공원들이 등장했다. 이제는 벤치와 이해 하기 어려운 조형물 몇 개로 구색을 갖춘 공원은 인적이 뜸해질 수밖에 없다.
문화재 보존과 활용의 방법으로 역사 공원에 대한 기대가 크다. 안전하게 보존하고 전시하는 문화재의 수동적 활용은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제는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에 ‘엑티비티형’ 역사 공원을 고려 할 때다. 그동안 우리는 문화재와 교육을 바로 연결하려고 했다. 문화재를 통해 역사 교육을 보완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문화재만이 가진 매력을 외면한 것인지도 모른다. 흥미와 관심이 발생하면 교육은 뒤따라 온다. 논어의 한 구절이다.
‘知之者不如好之者(지지자불여호지자), 好之者不如樂之者(호지자불여락지자).’
어떤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라는 뜻이다.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完)
<참고문헌>
유네스코와 유산, https://heritage.unesc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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