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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판다 Apr 15. 2023

속 좁은 아내의 반성문

생일이 뭔 대수라고

나의 옹졸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진심으로 반성합니다.

속이 안 좋다, 몸이 아프다는 당신의 말을 꾀병이라고 생각하고 외면했던 것을 반성합니다.


당신의 해외연수 일정이 나왔을 때에도 내 생일과 겹쳐서 짜증을 냈었죠. 나는 이미 그때부터 글러먹었던 겁니다.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올해는 나의 마흔 번째 생일이었으니까요. 중년에 접어드는 시점이니 올해는 뭔가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답니다. 그래서 오전 아홉 시에나 인천공항에 도착한다는 당신을 새벽부터 일어나 기다렸습니다.

는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어요. 당신도 여독을 풀어야 하니 점심을 간단히 먹은 후에는 일단 두세 시간 정도  쉬게 하고 오후 느지막이 우리가 보고 싶어 했던 영화를 보려고 했어요. 그리고 저녁은 근사한 데서 먹으면서 생일 분위기도 내고 당신의 여행 후기도 들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자마자 피곤하다, 아프다  말하는 당신을 보니  '아, 오늘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겠구나'하고 바로 감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속이 그렇게 안 좋으면 밥도 못 먹을 테니 잠이나 가서 자라며 긴 시간 비행기를 타고 온 당신에게 밥도 안 주고 방으로 밀어 넣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나도 깜빡 잠이 들었는데 깨보니 어느새 5시가 다 되어가더군요. 당신은 깊게 잠이 들어 있고요.

언제 일어나나 벼르며 기다렸지만 7시가 넘도록 당신이 일어날 생각이 없자 그때부터 정말 화가 났습니다. 당신이 분명, 여행에서 돌아오면 생일 재미있게 보내자고 했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기다렸기 때문에 너무 서운했어요.


혼자 나가서 커플들 사이에 앉아 쓸쓸히 커피를 마시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낸 후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그때까지도 자느라 몰랐겠지만요.

어쨌든 시간이 늦었는데 당신을 기다리느라 나도 온종일 굶었던 터라 저녁을 먹어야 했죠. 나는 당신이 속이 안 좋다고 한 걸 분명히 기억하면서도 김밥을 시켜서 당신을 깨웠어요. 네, 일부러 그랬습니다. 나는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반성합니다.

그때도 나는 당신이 아픈 걸 믿지 않았던 거예. 피곤해서 쉬고 싶어 엄살을 피운다고만 생각했거든요. 김밥 한 줄을 다 먹지 못하고 다시 방에 들어가는 당신의 등을 째려본 것도 미안합니다.


사실 당신이 끙끙 앓는 소리도, 방에서 몇 번이나 나를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은 척 했어요. 끈질기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결국 구시렁대며 방에 들어갔을 때 당신은 다리가 너무 아프니  조금만 눌러달라고 했고 나는 있는 힘껏, 사정없이 당신의 다리를 난타했습니다. 당신이 너무 아프다고 고통스러워했는데도요.

네, 그것도 일부러 그랬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악마인가 봅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아주 사악한 인간이에요. 성악설은 나 같은 인간 때문에 탄생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당신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그렇게 아파하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웠어요. 열이 펄펄 끓고 몸에 손만 대도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야 감기몸살이 심하게 왔다는 걸 알았습니다.

당신이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 내가 감기몸살로 고생을 했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당신이 불평없이 나를 살뜰히 보살펴줬다는 사실도요.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더군요.


생일 그까짓 게 뭐라고  아픈 남편을 하루 종일 내버려 두다니 .. 세상에 이렇게 한심하고 속 좁은 아내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당신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미 어젯밤 공항에서부터 아프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런 몸으로 내 선물을 고르러 다녔던 당신에게 나는 그때도 잔소리를 해댔던 거군요. 망고 좀 비싸게 사면 뭐 어떻다고  말이죠. 호구네 뭐네 막말했던 거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만간 브런치에, 남들은 베트남에서 다들 싸게 사 온다는 건망고를 당신이 이십만 원 가까이 바가지 쓰고 사온 얘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것도 미리 사과합니다.


오늘 나의 하루를 돌아보면 정말이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는 오늘 장님, 귀머거리였습니다. 내 생일이라는 생각에만 빠져서 당신이 어떤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어요, 아니 보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미운 네 살처럼 하루온종일 심통만 부려댔네요.


반성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당신의 건강과 안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아내가 되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합니다. 더불어 성숙한 어른이 되도록 수양하고  또 수양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년부터는 생일에 집착하지도 않겠습니다.


오늘 나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내가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부디 당신은나의 못난 행동을 너그럽게 잊어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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