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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산 Dec 07. 2024

재키 엘리어트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던 100개의 진심은 다 반짝이는 별과 같을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이 영화를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을 24살 무렵 만났던 것 같고, 그 후로 잊고 지내다가 얼마 전 "이 감동적인 영화를 나만 봤단 말인가?" 하는 사람을 만났다.

'대체 뭔데 그래?'

오랜 시간을 두고 좋은 평가를 듣는 이 영화를 한 번쯤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추천대로 24살에 영화를 봤더라면 그때의 느낌과 비교할 수 있었을 테지만, 현재의 내가 영화를 보고 감동을 한 지점은 빌리 엘리어트가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 제목을 'Jackie Elliot(아버지 이름)'이라고 했어도 어색하지 않았으리라. 게리 루이스의 감정 표현에 인색한 무뚝뚝한 아버지 연기가 역할을 잘 살려내기도 했다.


평생 탄광밖에 모르고 산 광부. 고된 탄광 일과 열악한 노동 환경. 부인과의 사별. 파업 시위. 몰아치는 현실의 거친 바람에 어느덧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마음, 그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 죽은 부인이 아끼던 피아노 소리도, 작은아들의 발레 타령도 그의 딱딱한 마음에서 튕겨 나가기만 했다. 받은 건 적지만 책임져야 할 일은 너무 많았던 우리네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얼굴이 겹치기도 했다. 좁은 세상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며 살아가는 성실한 가장이지만, 시대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없었던 아버지. 다른 세상, 다른 방식의 성공, 현실 너머의 꿈을 상상조차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빌리의 재능을 눈여겨본 발레 교사와 아버지 사이에서 어찌할 바 모르빌리가 당당하게 자신이 갈고닦은 실력을 아버지에게 보여줄 때, 미묘한 아버지의 표정 변화 속에는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모르던 다른 세상이 펼쳐질지도 몰라!'

그 뒤로 그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다채로워진다. 특유의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발레 교사에게 빌리는 자기 아들이니 이제부터 내가 뒷바라지하겠노라고 선언하였고 빌리의 오디션에도 동행한다. 오디션에 합격한 빌리와 장난치며 아이로 돌아간 듯 소리 내 웃기도 한다. 빌리가 마침내 발레리노가 되어 국립 극장에서 백조로 날아오를 때, 재키 엘리어트의 마음도 함께 날아올랐다. 춤을 출 때 모든 것을 잊고 그저 한 마리 새가 되어 나는 것 같다고 했던 빌리처럼, 그의 마음도 새처럼 날아오르는 것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좁은 반경에서 팍팍한 현실만 마주하며 살다 보면, 어떤 것들은 사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랑말랑한 예술 감성도, 춤도, 음악도, 미술도, 글쓰기도, 운동도, 여행도, 웃음마저도. 확실한 보장이 없는 꿈을 꾼다는 것, 미래를 그려본다는 것도 사치가 될 수 있다. 빌리가 현실 너머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실현함으로 그의 아버지도 잃었던 생의 선물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만약 춤을 출 때 느껴지는 자유와 흥에 비해 빌리의 재능이 모자랐다면 어땠을까? 어찌어찌 로열발레학교에 입학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더라면? 그렇다고 해도 빌리나 그의 아버지가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는다. 자기 안의 열정과 꿈을 믿고 달려본 그 경험이 앞으로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설계하게끔 이끌지 않았을까? 국립 발레단의 무용수는 못 되어도 발레 교사가 될 수도 있었을 거고, 발레와 관련된 다른 일을 했을 수도 있겠지. 현실에서는 훨씬 자주 일어나는 일들이다. 발레를 시작하는 100명의 아이 중 국립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가 되는 아이는 극히 일부일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의 도전이 모두 실패인 것은 아니다. 내 안의 즐거움, 열정, 가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어딘가에 담아낼 수만 있다면 모두가 주목하지 않은들 어떤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던 100개의 진심은 다 반짝이는 별과 같을 것이다.


꿈을 이룬 성인의 빌리. 오랜 훈련으로 단단한 근육질이 된 등과 팔. 근육에 담긴 세월이 느껴졌다. 어쩌면 발레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가족과 갈등하던 시절보다 더 힘든 시기가 있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일을 취미로 하는 것과 직업으로 삼는 건 전혀 다른 접근이다. 그래서 직업은 좋아하는 일보다 잘하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고들 한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지만 돈을 못 벌 수도 있다. 시대가 알아주지 않으면 말이다.

무대에서 힘껏 날아오르던 빌리와 그런 빌리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표정은 그 모든 가능성을 껴안고 한 걸음씩 꿈을 향해 나아간 자들의 힘찬 날갯짓처럼 보였다.


이제 곧 우리 아이들도 불확실한 도전 앞에 서게 되겠지? 빌리처럼 모든 걸 다 잊게 만드는, 자신마저 사라져 한 마리 새처럼 자유를 경험하는 기분을 선사하는 그런 일을 발견해서 직업으로 연결되면 더없이 좋겠다. 그런데 솔직히 나도 아직 그런 일을 발견하지 못했다. 좋아하기도 하고, 잘하기도 했던 그 어떤 일도 무한한 열정과 기쁨과 자유를 주는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엔 이것저것 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한 분야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고민이었지만 이젠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처럼 될 수도 있겠지만, 기왕이면 빌리처럼 가슴 벅찬 일을 발견하면 더 좋겠다. 그리하여 한 마리 새처럼 훨훨 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마음으로 함께 날 수 있다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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