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되지 않는 우리 정원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푸른 잎을 내어놓는다.
때마다 깍아주지도, 틈을 비집고 맹렬하게 자라나는 잡초를 그때그때 뽑아주지도 못하는
게으른 주인은 항상 미안했다.
봄날 어느날 정원의 모습
하지만 묵묵히 제 몫을 하고 있는 녀석. 난 그래서 우리집 잔디가 고마웠다.
잔디 사이에 삐져 올라오는 잡초를 뽑을 때면 땅에 깊숙이 뿌리내린 잔디와는 달리
쉽게 뽑히는 그들의 얕음을 감사하기도, 얕보기도 했다.
2주 전 오랜만에 팔을 걷어붙이고 정원을 손질하다 꽃잔디 사이사이
잡초처럼 웃자란 잔디들을 발견했다. 꽃이 사라진 꽃잔디에 길쭉길쭉 올라온
잔디는 어느 잡초보다도 더 보기가 싫었다.
몇년 전에는 잔디와 꽃잔디 세계의 경계가 분명했지만 별도의 경계석도 없는 이상
좁은 정원에서 서로를 오고 가는 것은 생장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꽃잔디 위에 불쑥불쑥 제멋대로 올라온 잔디
"자! 까짓것 잡초처럼 뽑으면 되지!"
야심 차게 뽑았다. 하지만 뽑힐 리가 없지 않은가. 잡초를 쉬이 제거하며 예찬하던 튼튼한 뿌리가
쉽게 뽑힐 리 만무했다. 애꿎은 파란 잎만 뚝뚝 잘랐다. 엄마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니식물 박사이신 친정엄마가 어제 드디어 정원에 등판하셨다. 그리고는 과감하고 생각지도 못하게, 꽃잔디와 잔디의 경계를 호미로 파며 급기야 카펫 들듯 꽃잔디를 들어 올리셨다. 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식물을 아끼지도 못하지만 잘못 다루면 어찌 될까 이런 시도는 상상조차 못 했기에 더욱 놀랐다.
뒤이어 이어진 엄마의 잔디 제거.
잔디는 아래가 아닌 옆으로 뻗어나가는 식물이다. 꽤 뿌리가 깊으며, 뿌리 또한 단단하다. 그와 반대로 꽃잔디는 지표식물로 얕고 넓게 포복성으로 퍼져나가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카펫처럼 걷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우리 엄마의 잔디 제거는 그 카펫 속을 들여다보며 시작되었다.
"이 뿌리 보이니? 굵은 것이 잔디 뿌리야. 얘네들을 따라가면서 제거하고, 절대 끊어지면 안 돼! 그래야 온전히 제거할 수 있어. 보이는 잎만 뽑았다가는 금세 다시 올라온단 말이야. 뿌리를 아예 뽑아 다시 나지 않게 해야지!"
엄마가 하나 뽑으신 잔디는 긴 노끈에 엮어진굴비처럼 뿌리에 규칙적 간격을 두고 파란 잎들이 나 있었다.
그 길쭉한 잎들이 그렇게 꽃잔디 땅 속을 휘집고 다니며 자기 영역을 키워간 것이다.
요령을 익히고 나서는 어렵지 않았다. 불순분자를 색출하듯 집요하게 뿌리를 잡고 끝까지 제거해나갔다. 감자 캐듯 잔디를 캤다. 그 뿌리를 따라 긴 잔디가 4~5개씩 따라 나오면 탄성을 질렀다.
모든 문제가 그랬다. 근원을 알고, 제대로 없애지 않으면 똑같은 문제는 언젠가 반복된다. 꽃잔디를 걷어내듯 판을 흔드는 용기도 필요할 수 있다. 그렇기 위해선 각각의 속성을 이해한 적절한 처방과 노련한 기술이 필요하다. 내 힘으로 안될 것 같으면 친정엄마 같은 조력자의 도움도 얻어야 한다. 모두 다 쉬운 일은 아니다. 여름날 1시간 땀을 쏟으며 잔디와 씨름을 하는 것보다도 몇 배는 더 힘들겠지. 하지만 근원에 접근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은 진리이기에, 나의 용기와 더불어 끈기도 필요한듯하다.
그리고 내 앞의 문제가 단순히 그 자리에서 시작됐다고 착각하지 말자. 내 앞에 삐죽 올라온 잔디가 꽃잔디 경계 끝에서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유관으로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 그건 긍정의 신호일 수도 있다. 내가 가진 한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면 뜻하지 않게 다른 문제까지 해결되고 편안해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니까.다른 한편으로 어떤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그 문제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찬찬히 들여다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근데 잔디는 나에게 고마운 존재였다고 서두에 고백하지 않았나? 한 뼘도 안되고, 경계도 따로 없는 곳을 그저 살짝 넘은 것뿐인데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같은 존재도 어느 곳에 있느냐에 따라 환영받거나 그렇지 못할 때가 있지 않은가.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하루아침에 고마운 존재에서 뽑혀 없어질 존재로 바뀌는 잔인성은 그래서 오히려 현실적이다.
상념과 맞바꾼 작업은 1시간여 만에 끝이 났다. 뽑힌 잔디와 잡초를 정리하고 엄마의 코치대로 들뜬 꽃잔디를 꾹꾹 밟고, 물을 듬뿍 주었다. 꽃잔디도 며칠 몸살을 할 듯하다. 뽑힌 것들 만큼이나 헤집어진 자신도 얼마나 힘이 들까.
하지만 포기하지 말자. 그래야 내년에는 잔디에게 잠식되지 않은 풍성하고 이쁜 꽃잔디를 볼 수 있고, 여름정원도 한결 깔끔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