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잼도시 대전에 이런 곳이 생겼다고?
수년 전, 대전에 카이스트 학생들이 언더그라운드 클럽 벤트를 오픈했다는 이야길 들었을때 나의 반응은 의아함과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직접 벤트에 가서 벤트 크루들의 공연을 보았을 때 기대 이상의 디제잉 실력에 한 번 더 놀랬다. 이후로 벤트는 대전에서 음악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은 아지트가 되었다. 벤트를 방문하면서 문득 ‘어쩌다 노잼도시 대전에서 언더그라운드 클럽을 운영하게 되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벤트 운영진 디제이 TAESCO와 Rootmin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벤트를 시작하게 된 배경
벤트를 구상할 당시, ‘대전에 이태원 같은 곳이 왜 없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이태원은 주류와 관계없이 다양한 음악을 트는 클럽이 존재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곳이다. 지금 벤트를 운영하는 우리도 이태원 클럽을 다니며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디제이의 역할 중 하나가 음악을 선별하여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들려주는 것인데 청중들은 그들을 통해 음악을 폭넓게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벤트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전 사람들이 편하게 왔다가 뜻밖에 좋은 음악을 발견하는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경험할 수 있는 곳. 새로운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자유롭게 와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지트 또는 쉼터를 만들고 싶다. -DJ TAESCO & DJ Rootmin
기억에 남는 벤트 손님
벤트에 종종 오는 태준이라는 친구가 있다. 태준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열정적으로 음악을 즐긴다. 이 친구를 볼 때마다 진정한 레이버(raver)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아직 보수적인 분위기가 있는 대전에서 음악을 이런 식으로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 다른 기억에 남는 손님은 벤트에서 열린 료헤이(양평이형)의 씨티 팝 공연을 보려고 대구에서 오신 분이다. 지방 공연을 직접 검색해서 벤트까지 와주신 분은 처음이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 있다는 게 기뻤고 한국에서 비주류 음악도 가능성이 있다는 걸 확인한 기회였다.
벤트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 & 해결책
대전에서 언더그라운드 무브먼트의 불씨를 지피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시작했지만 여전히 맨땅에 헤딩 중이다. 대전 사람들에게 이런 종류의 음악이 존재하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알려주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니 시도와 실패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운영진 중에 경영을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이 있는 사람이 없으니 백지상태에서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다.
카이스트 동아리 활동의 연장으로 친한 선후배들끼리 시작했다가 방법을 몰라 초반에 놓친 부분 많다. 예를 들어 우린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지향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운영진들 각자 추구하는 장르나 분위기가 조금씩 다르다. 초반에는 날을 정해 하루는 트랜스 뮤직, 다음 날은 칠하우스나 디스코를 트는 방식으로 운영했었다. 이런 방식은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었고 손님뿐만 아니라 운영진까지 벤트라는 공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지금은 하우스, 디스코, 테크노 등 특정 장르를 시간대를 다르게 해서 편성하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지금까지도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쉽게 다가갈지 고민하며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방문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고려해서 공간을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대전사람들은 엉덩이가 무겁다. 방방 뛰는 음악을 틀어도 잠잠하고 부끄러움이 많다. 디제이 가까이에 서서 즐기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앉아서 즐기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왜 스테이지로 나가지 않을까 고민이었다. 시행착오 끝에 손님이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스탠딩 테이블을 활용해서 공간과 좌석을 배치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소규모 비즈니스이다 보니 비용절감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인테리어와 음향, 조명 등 필요한 부분은 각자 전공과 본업을 살려서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그러다 보니 벤트 곳곳에 우리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특히 음향에 신경을 많이 썼다. 스피커 볼륨 조절에 실패하면 방에 맞는 음파만 남아서 그 소리만 들리게 된다. 문제는 이걸 잡기가 어려운데 공연을 하러 오신 분들이 음향이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벤트 팀 문화 & 운영 원칙
우리는 투명하고 수평적인 문화를 추구한다. 서로 솔직하게 의견을 나누고 수용할 건 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대화하고 결정을 내리기까지 과정이 길다. 시간/에너지 소모적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나중에 불편하거나 불평하는 상황을 만들지 말자이다. 실수하면 리스크가 크고 우린 리스크를 견디기에 필요한 자원이 제한되어 있다. 서로 소통하며 혹시 우리가 놓친 게 있지 않을까를 점검하고 실수를 최소화하는 데 비중을 두는 편이다.
벤트 운영 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안전과 평등이다. 벤트 공간에서 성별 상관없이 안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관리를 철저히 한다. 보통 클럽을 생각하면 퇴폐적인 곳으로 생각하는데 이런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운영진 멤버들끼리도 서로 평등하게 대우하고 문제가 생기면 투명하게 공개한다.
앞으로의 운영 계획
처음과 비교하면 지금의 벤트는 많은 성장을 했다. 처음엔 스피커와 전등도 없었지만, 이후로 조금씩 우리만의 공간을 직접 만들어 온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흔히 LP라고 알고 있는 바이닐 레코드를 취급하는 숍도 겸할 계획이다. 요즘 아날로그 레코드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레코드숍 오픈과 함께 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클래스와 프로그램도 제공할 예정이다. 디지털로 음악을 소비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할 계획이다.
※참고: 클럽 벤트는 2020년에 문을 닫고 레코드 전문점 아일 레코즈(Aisle Records)로 새로운 행보를 시작했다. (벤트 크루는 여전히 유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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