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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셉 Jan 05. 2021

진짜 바보

[의자 놓기_01] 그렇게 한번 살아보기

“이번 네팔 해외봉사는 전 선생이 다녀오는 것이 어떨까?”찰나였다. 근무하던 대학교는 네팔의 한 기숙학교와 자매 결연하고 매년 학생들을 선발해서 봉사단을 파견했다. 한참 장학 사정 때문에 바쁜, 그것도 부서의 막내인 내게 팀장님은 왜 그랬을까.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빤하게 보여서 짜증이 났다. 바로 전 해 여름, 터키로 해외탐방을 간다고 했을 때는 부서의 선배들이 싫은 척하면서도 어떻게든 인솔자로 가보려고 팀장님께 틈이 나는 대로 온갖 아양을 떨어대지 않았던가. 이전 해는 어땠던가? 미국 서부로 학생들을 데리고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입 직원인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봉사활동에 네팔이라니 다들 안 가시겠다? 얄미울 정도로 똑똑한 이모 선배와 심모 선배가 팀장님과 함께 이야기를 마치고 탕비실을 나오는 순간 심상치 않은 기운도 이들을 따라 나왔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표정들 넘어 불길한 예감은 본능적으로 감지되었다. 정글과도 같은 직장생활에 바보처럼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습득된 능력 같지 않은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밥벌이하면서 부서 예산으로 해외를 다녀오는 기회는 조직 내 모든 직원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아니었다. 솔깃한 기회였다. 단, 결혼과 같이 중대한 통과의례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 팀장님도 알고 부서 선배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신혼살림 장만 및 마지막 예식 준비와 학교 장학 사정을 병행하며 내가 무척이나 고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걸. 2주 간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단 사흘 뒤에 내가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을! 그뿐 만이 아니었다. 봉사활동 전체 절반의 기간 동안은 동행하시는 부서 처장님의 의전을 도맡아야 했고, 여행사 전담 가이드가 주도하는 여타 해외탐방 프로그램과 달리 인솔자가 학생들 전체 봉사활동 일정관리 및 안전을 총책임 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분노했다. 팀장님께 난색을 표해야 하는 시점이었고 거절할 명분도 있었지만, 이 이상한 능력은 다시 한번 팀장님의 권유가 사실은 순전한 권유가 아님을 깨닫게 했다.


안도현 시인이 살아남으려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안에 고인 피를 뱉을 수도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 피는 것이 꽃이라 했던가. 나 역시 인생의 중한 일을 앞에 두고 달갑지 않은 이 모험을 떠날 수도 떠나지 않을 수도 없었을 때 예상치 못한 삶의 꽃망울들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처세술을 부릴 신통한 내공도, 그 시간을 헤쳐 나갈 별다른 열정과 여력도 없이 떠밀려 온 내 등을 토닥여준 네팔은 신비롭게 따뜻했다. ‘어서 와. 네팔은 처음이지?’ 기숙학교 내 현지 아이들은 무공해 유기농 눈빛과 웃음을 쉬지 않고 발사했다. 맨발로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미안할 정도로 경계 없이 낯선 땅에서 온 이들에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전기 공급이 제한되어 있어 거의 매일 저녁 촛불을 켰지만 어둠이 내린 하늘엔 수억만 개의 영롱한 천연 전구들이 켜졌다. 소나기가 내리듯 유성들이 산등성이 너머로 떨어졌다.


살아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 안에 가득 고인 피,

뱉을 수도 없고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꽃은, 핀다

꽃-안도현 


피할 수 없어 내몰린 갑작스러운 모험은 나를 진짜 바보로 만들어주었다. 멀리서도 손에 잡힐 듯 우뚝 서있던 안나푸르나는 아무도 바보처럼 살려하지 않을 때 한번 그렇게 살아보지 않겠냐고 했다. 손가락으로 밥을 먹고 얼음장같이 찬 물로 이를 부딪치며 머리를 감고 좁은 길에 마주 오던 소에게 길을 내주면서 좁디좁은 공간에서 약삭빠르게 살아남으려 길러진 뭐 같은 감지능력은 일시 자연 퇴화되었다. 장학업무를 하며 어느새 학생들을 인격이 아닌 일로, 숫자로 대하고 있던 내가 봉사단 학생들을 통해 다른 학생들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던 것도 너무 큰 선물이었다. 결혼 막바지 준비를 거의 혼자 감당했던 아내는 네팔의 햇볕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도저히 봐줄 수 없을 정도로 그을린 내 얼굴을 보자마자 공항에서 주저앉을 뻔했다지만, 그거 아는가? 한 사람을 오롯이 받아들여 한 몸 되는 진짜 인생 모험의 첫 발을 떼던 나는, 바보 온달 마음 마냥 정성스럽게 닦여 빛나고 있었단 걸.





# 당신의_일상에_의자_하나_놓기

# 편히앉아서쉬다가세요

# foryourch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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