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예서 Apr 16. 2023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나와 화해하기-<성난 사람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성난사람들(Beef)>은 언제 폭발하지 모르는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는 화를 

간신히 누르고 사는 두 사람이 우연히 얽혀 서로의 밑바닥까지 보게 되는 이야기다.

한국계 작가 이성진이 연출을 맡았고 <워킹데드>, <놉>, <미나리> 등으로 친숙한 배우 스티븐 연이 대니 역을, 미국 유명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앨리 웡이 에이미 역을 맡아 놀라운 연기를 선보였다.


대니는 자살 시도를 위해 산 물품을 환불하러 간 마트 주차장에서 길게 클락슨을 울리는 흰색 SUV 차량과 맞닥뜨린다. 안 그래도 환불에 실패해 잔뜩 화가 나있던 대니는 SUV 차량 운전자 에이미가 창문 밖으로 내민 가운데 

손가락에 제대로 열받게 되고, 도로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며 한바탕 추격전을 벌인다.

대니와 에이미의 서로를 향한 분노는 사소한 싸움으로 시작됐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증오의 불꽃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까지 모두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큰 화마로 변해 버린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도급업자 대니와 성공한 사업가인 에이미는 다른 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대니는 미국에서 모텔 사업을 하다 사업 실패로 한국에 돌아간 부모님을 다시 모셔와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있다. 돈 벌 생각이 없는 예술가 남편을 둔 에이미는 실질적인 가장으로, 사업 상대자인 토니의 비위를 맞춰가며 고군분투 중이다.

이들은 나 아니면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부담감 외에도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대니는 동양인이란 이유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에이미는 우연히 아빠의 불륜을 목격하고 부모님이

싸우는 게 내 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아무도 날 원하지 않는다는 믿음의 씨앗이 그녀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게 된다. 상처받은 어린아이의 영혼을 갖고 몸만 어른이 된 이들은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이 험난한 세상에 던져져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된다.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언제든 이글거리는 화와 분노를 기꺼이 표출할 준비가 이들은 본능적으로 나와 닮은 상대방을 알아보지만 자각하진 못한다. 누구도 물러서지 않고 끝없이 상대방에 상처를 입히는 대니와 에이미의 복수는 자살 시도를 하고, 나이 많은 남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던 그들의 자기 파괴적 행동과 겹쳐 보인다. 상대방을 죽일 듯이 미워하고 있다 생각했지만, 사실 그들이 그토록 분노대상은 증오, 자괴감, 화로 점철된 자기 자신이었다.



대니와 에이미는 자신들이 벌인 복수로 사랑하는 가족과 어렵게 일궈낸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모든 분노와 화를 잠시 뒤로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의 모습을 바라본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은 트라우마를 싸는 거야", "내면의 표면 바로 아래가 비어있는데 꽉 찼어" 등

누구도 공감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 혼자 끌어안고 있던 속마음을 처음으로 털어놓으며 대니는 에이미가 되고

에이미는 대니가 된다. 대니가 에이미의 이야기를 하고, 에이미가 대니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다른 게 없는 같은 인물임을 알려준다. 그들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나의 약하고 보잘것없는 자아를 타인의 모습을 통해 마주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상처 투성이인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가장 싫어하고 도저히 좋아할 수조차 없었던 '나'와의 솔직한 대면을 통해 화해를 시도한 이들은 

의기투합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에이미를 찾던 남편 조지가 대니를 오해하고 총으로 쏴버려 그는 순식간에 혼수상태가 된다. 


  "내가 기억하는 한 살아 있다는 건 그런 거야. 공간이 없으면 형태도 없어. 어둠 없이는 빛을 경험할 수 없고."

정신 나갈 거 같이 시끄럽고 악에 받친 복수극은 조용한 병실 안에서 에이미가 대니를 끌어안는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짙은 어둠이 가득했던 병실 안으 하나가 된 그들을 비추는 빛이 들어오고, 이내 색색깔의 불빛은 주변의 어둠을 서서히 몰아낸다. 어둠 없이 빛을 경험할 수 없다던 대니의 말처럼,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한

내면의 밑바닥을 직면한 그들에게 남은 건 상처를 딛고 일어서겠다는 한줄기 빛의 희망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들의 앞날이 마냥 평탄하진 않겠지만,

자기 혐오라는 뿌리 깊은 문제 해결의 근본적 실마리를 찾아냈으니, 좀 '덜 성난 사람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