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힘들게 지리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불편함을 즐기며 고통스러움이 익숙해지고서야 생경하고 가슴 뿌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리산 반야봉 아래 법의 자리인 묘향암 마루에 앉아 아침 해가 숲을 깨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집고 나온 숲의 바람이 내게 왔습니다. 맑고 생동감 있는 새벽바람 앞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순간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자연이 내게 베푸는 은혜로움임을 알았습니다.
야생화는 경이롭습니다. 그리고 눈 맞춤했을 땐 반갑고 정겹습니다. 나도 모르게 코끝을 세워 진한 향기를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숲에 핀 꽃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야생이 처절하기에 화려한 곁가지는 버리고 소담하고 고고하게 핍니다. 지리산에 피는 붉은 동자꽃은 살아남기 위해 눈에 잘 띄는 곳 보다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주치곤 합니다. 그래서일까. 오늘 보일 듯 말 듯 한 언덕배기에 줄기 하나 뻗어 핀 인동초와 눈 맞춤을 합니다. 흐드러지게 뒤덮은 인동초 무리가 아닙니다. 이 자리는 매년 풀베기로 인동초가 군락을 이룰 수 없습니다. 딱 한줄기가 뻗어 나와 피었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반가운 꽃입니다.
몇 년간 산길 풀베기 작업으로 여름, 가을 야생화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야생화가 지천입니다. 자신을 만지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졌다는 키 큰 엉겅퀴가 꽃대를 살랑이며 반겨줍니다. 하얀 꽃불을 밝히고 있는 산딸나무와 눈썹 하나를 뽑아주고 따 먹었던 뱀딸기가 탐스럽게 붉습니다. 새콤달콤한 산딸기 하나를 입에 넣고 일상의 소음과 분주함을 잊고 쉬엄쉬엄 걷는 산길이 참 좋습니다.
산바람이 우듬지 사이를 비집을 때면 새들은 소리로 숲을 채웁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어 행복합니다. 무거운 침묵이 지그시 누르는 유월의 숲속에 뻐꾸기 울음소리가 가득합니다. 어슬렁거리며 듣습니다. 잔잔한 소리입니다. 곰삭은 듯한 자연의 소리에 묻혀 노마드적 삶을 꿈꾸는 이 순간이 이렇게 행복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