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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Apr 11. 2024

좋은 시간, 나쁜 여자(21)

21. 여자의 욕망

“정호 씨.”     

정호는 가냘픈 실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정호 씨라고 부르는 현경을 쳐다보며 혼란스러웠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현경이었는데 다시 지영이의 영혼이 등장한 것이었다.     

“어, 그래. 지영이지?”

“맞아, 나 지영이.”

“조금 전까지 현경이었어. 갑자기 실신하더니 한참을 의식이 없었어.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당신 목소리가 들려서 그 소리를 따라 정신을 집중했는데 당신이 보이는 거야.”

“현경이 영혼은 다시 사라진 거야?”

“그런 거 같아.”

“그럼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거네?”

“아마도.”     

정호는 현경과 지영이의 영혼이 수시로 뒤바뀌는 상황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지영이라고 생각하며 사랑을 나누다가 갑자기 현경이 영혼으로 바뀌면 어쩌나? 아니 이제는 두 영혼은 인정하지만 한 육체를 가지고 두 사람으로 대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영아, 내 말 잘 들어. 나는 네가 다시 나한테로 와서 너무나 기뻐. 하지만 이건….”

“무슨 말인지 알아. 다른 사람의 육체를 통해 다시 살 수는 없다는 것도. 내 영혼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어.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야. 그동안 당신과 해보고 싶은 게 있어. 시간이 허락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드네. 나하고 해보고 싶은 게 뭐야?”

“난, 당신이랑 울릉도 여행을 다시 가고 싶어. 20년 전에 갔던 그때로 돌아가면 내가 당신을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란 생각에 아쉬움이 많았었거든.”

“또 있어?”

“두 번째는 당신과 나만의 뭔가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 그런데 당신이 몰랐으면 해. 내가 뭘 남겼는지는 말이야.”

“세 번째는?”

“마지막인데 여자로서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어. 한순간만이라도.”     

정호는 지영의 말을 듣고 첫 번째는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사실 자기가 어떻게 해줘야 할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정호를 바라보는 지영의 눈빛이 영롱한 이슬을 머금은 듯 빛나고 있었다.     

“그래, 지영아. 세 가지 모두 해보자. 두 번째 세 번째는 구체적인 방법이 잘 생각나지 않지만, 첫 번째 울릉도 여행을 다시 가면 나머지 두 번째 세 번째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고마워. 정호 씨. 내 사랑.”     

지영은 정호의 품에 안겼다. 영원토록 그의 향기를 맡으며, 그의 숨결을 느끼고, 그의 몸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정호는 그런 지영을 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현경의 육체를 안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런 정호의 느낌을 알아챈 듯 지영이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주방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양파와 당근, 달걀이 있었다.     

“정호 씨. 배고프지? 오늘은 내가 볶음밥 해줄게.”

“그래. 좋아.”     

지영은 양파와 당근을 잘게 썰었다. 툭탁툭탁 도마질하는 소리에 정호는 지영의 뒤로 가서 백허그를 하며 말했다.     

“지영아, 다시 내게로 와줘서 고마워.”

“날 잊지 않고 생각해줘서 내가 더 고마워.”     

정호 지영의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한 후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서 앉았다. 지영이가 요리하는 모습을 계속 사랑스러운 눈으로 지켜봤다. 지영은 그런 정호의 모습을 보며 지금, 이 순간이 여자로서 행복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요리를 하고 그걸 기다리며 사랑을 표현해주는 남자, 그리고 맛있게 먹어주는 남자. 지영은 그런 부부생활을 꿈꿨었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온 날들은 돈 때문에 사랑을 저버린 대가가 너무 컸었다.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그녀의 결혼생활이 문득 떠올랐다. 아버지의 수술과 병원비 때문에 나이 많은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나서 얼마나 울었던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야만 하는 자신의 현실을 얼마나 비관했던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눈 정호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떠났던 그때의 심정으로 돌아가니 한없이 미안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그윽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정호를 생각하니 행복이란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세 번째 소원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가 애써 설명을 붙이지 않은 두 번째 소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것. 그것 또한 이미 이루지 않았던가. 당연히 자신만 알고 정호는 몰라야 하는 그런 사실. 지영은 그런 자신을 생각하니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딸의 인생을 망쳐버린 것 같은 죄책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생각 또한 길게 들어서지는 않았다. 사랑받는 여자로 살아보고픈 욕망이 딸의 인생마저 저버리게 만든 것이었다. 지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넌 참 나쁜 여자야, 나쁜 엄마이고.’ 어떻게 욕망이 모성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어차피 현경이 영혼이 나보다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아. 젊은 영혼이라 나름 버티고는 있지만 얼마 못 갈 거라는 느낌이 들어. 지금 상태에서 내가 현경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나라도 있어야 현경이 육체가 그나마 보존될 수 있는 거야.’ 지영은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었다. 다만 자신의 육체가 사라지고 영혼이 함께 가지 못해서 딸의 육체로 들어갔는데 딸의 영혼이 흐려지면서 자신이 계속 육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모든 걸 정호 씨에게 말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야. 그리고 현경이가 딸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면 충격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지영은 자신의 욕망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자 소름이 끼쳤다. 그래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제는 누구의 인생을 살 것인가 선택해야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꼈다. 

‘현경이로 살 것인가? 지영이로 살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정호는 지영이가 해준 볶음밥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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