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조바르 Apr 15. 2024

좋은 시간, 나쁜 여자(23)

23. 메데이아의 오이디푸스 복수

호가 서명한 이혼서류를 집어 든 수정은 서류를 말아쥐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래,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겠지? 곧 평생을 후회하는 복수를 해줄게. 기다려.’

수정은 정호와 현경의 유전자 검사 결과서를 꺼냈다. ‘99.9% 부녀관계 일치함.’ 어떻게 하면 가장 치명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데이아는 남편 이아손의 배신에 대한 복수로 남편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고 했던가! 남편이 보는 앞에서 현경이가 자살하게 만들까? 아니야, 또 다른 신화가 생각났다. 오이디푸스왕은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예언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자신의 눈을 찔러서 멀게 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자신의 딸과 관계한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남편은 죄책감에 스스로 무너질 거야.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아니, 죽지 말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게 할 거야. 암, 그렇지.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까 그러면 안 돼. 하루하루가 죽지 못해 사는 고통을 맛보게 할 거야.’     

수정은 머릿속에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그리며 노트북을 열었다. ‘오이디푸스 복수계획’. 계획서를 작성하며 처절한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목표는 남편 정호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복수의 칼 역할을 할 유전자 검사서가 있다. 정호는 현경이 친딸이라는 걸 모른다. 그런데 둘은 오피스텔에서 뜨겁게 육체를 탐닉했다. 이제 남은 건 어떻게 부녀관계란 걸 알게 할 것인가? 만 남았다. 그것도 극적으로 알게 해야 충격이 클 것이다. 수정은 오피스텔에 설치해 둔 동영상을 계속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탐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난번 탐정의 무리한 요구에 다소 언짢았었는데 먼저 연락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사실 남편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고 벌린 일이지만 자신도 잘못한 게 많았다. 남편에 대한 욕구 불만에 다른 남자를 만난 건 자신이 먼저 저지른 일이었다. 그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었고, 자신은 사랑 없는 섹스만 했는데 남편은 너무나 어린아이와 재미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었다. 수정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소름이 끼쳤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다시 생각해 봐도 복수를 해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멈추고 화해를 해야 할까? 수정은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이 상태로는 남은 인생을 남편과 보낼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끝낼 거라면 다시는 생각나지 않도록 확실하게 끝내자. 그래, 좋았던 기억만으로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어. 이미 깨진 독이고, 엎질러진 물이야.’ 수정은 다음 계획을 써 내려갔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진행절차를 3단계로 만들었다. 1단계, 정호와 현경의 관계가 더 깊어지도록 만든다. 이를 위해 정상적으로 이혼을 한다. ‘아쉽지만, 복수를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해.’ 이혼하고 나면 정호가 현경의 오피스텔에서 살다시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더 정이 들게 기다렸다가 2단계를 실행한다. 2단계는 정호가 현경의 아빠라는 사실을 정호 스스로 알게 만든다. 절대 수정이 유전자 검사결과를 제공해서 알게 만들지 않는다. 유전자 조작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일 수도 있으니까. 수정은 이를 위해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 유전자 검사를 하게 만들 수 있을까?’ 둘 사이에 자신이 개입하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 알게 만드는 방법. 수정은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 무릎을 쳤다. ‘그래, 그 방법을 쓰면 돼. 그렇지, 이럴 때 보면 난 천재야,’ 수정은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3단계는 ‘오이디푸스왕의 선택’이라고 썼다. 남편 정호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충격에 빠졌을 때 마지막 일격을 가함으로써 죽음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획서 마지막 줄에 이렇게 썼다. ‘마지막 일격, 메데이아!’ 메데이아가 자식을 남편이 보는 앞에서 죽인 것처럼 자기 아들과 딸이 아빠의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만드는 것처럼 꾸며서 삶과 죽음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계획이 완성되자 수정은 이미 성공한 것처럼 입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수정은 손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봤다. 마녀의 미소처럼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런 기운을 좋아했다. 사업가로서 업계의 주목을 받을 때도 이런 기운을 느꼈었다. 누군가를 짓밟고 일어서는 쾌감. 상대가 아주 비참하게 무너질수록 겉과 다른 마음속 상태. 자신만이 아는 그런 심리상태를 가지고 여유를 부리는 모습. 수정은 어릴 때부터 그런 심리상태에 익숙했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맞았다. 수정은 자신이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가질 수 없게 만들었었다. 유치원 다닐 때 좋아했던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남자아이는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했다. 수정은 그 남자아이를 친구에게 뺏기기 싫었다. 수정이 선택한 방법은 남자아이가 나쁜 아이라고 소문을 내는 것이었다. 자기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며 거짓말을 했고,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남자아이가 자기한테 뽀뽀했다고 말해 울게 만들기도 했다. 나중에 모든 게 수정의 거짓말로 드러나자 엄마에게 혼났던 일도 있었다. 그런 수정이 지금 정호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방법으로 아들, 딸을 동원하지 못할 리 없었다.      

며칠 후, 수정은 정호에게 먼저 연락했다. 정호는 수정의 전화번호가 찍히자 내키지 않았지만 통화버튼을 눌렀다.

“응.”

“오랜만이네? 오랜만에 전화했는데 응 한마디만 하네.”

“무슨 일이야? 바쁜 사람이.”

“내가 며칠을 고민해봤는데 이제 당신한테 자유를 주는 게 맞는 거 같아.”

“자유?”

“이혼해 줄게. 당신이 서명한 서류를 보고 괘씸해서 안 해주려고 했는데 그럼 서로 불행해지겠더라고. 그래서 이혼해 줄게.”

“다른 말은 하고 싶지 않아. 더 들을 말도 없고.”

“잘난 척하기는. 쥐뿔도 없으면서.”

“그런 말은 20년간 들은 거로 충분해. 언제 서류 접수할 건지만 말해. 시간 낼 테니까.”

“늘 그런 식이지. 야망도 없고, 포부도 없는 나약한 인간.”

“싸우자고 전화한 거 아니면 그런 말은 하지 말고.”

“내일 10시에 법원 앞에서 만나.”

“알았어. 그만 끊을게.”

정호는 미련 없이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수정은 정호의 달라진 태도에 짜증이 났지만 1단계를 시작하는 첫 단추를 끼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10시. 법원 앞.

수정은 먼저 기다리는 게 싫었다. 일부러 10분 늦게 법원 앞으로 갔다. 정호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 약속만큼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정호는 수정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착잡했다. 연애부터 결혼, 아이를 낳고 키웠던 순간, 그리고 이혼을 하는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수정은 정호를 쳐다본 후 바닥만 바라보고 걸었다. 일부러 정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수없이 이혼하자고 했던 말들은 말로만 지나갔지만 이제 현실이 되는 순간이어서 그런지 그녀도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서류는?”

“….”

수정은 대답 대신 서류봉투를 꺼내 보였다. 이혼하는 마당에 낭만적인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첫 마디가 ‘서류는?’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 

“당분간 아이들한테는 비밀로 하자. 나는 아이들이 올 때마다 출장 간 거로 하고. 내 짐도 필요한 것만 챙겨서 나올 테니까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뭔 개소리야. 이혼하면 끝이지. 아이들도 성인인데 알건 알아야지.”

“난, 당신의 그런 이기적인 성격을 아이들이 닮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뭐, 또 싸우자는 거야.”

“그만하자. 일단 서류 접수하고 아이들 문제는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

수정은 정호의 말에 대꾸하고 싶었지만 돌아서서 앞장서는 모습을 보며 목까지 넘어온 말을 눌러 삼켰다. 법원에 들어서자 이혼서류를 제출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처음 보는 광경에 두 사람은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오죽 못났으면 이혼을 할까! 정호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특히, 남자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봤다. 어떤 남자는 아내에게 잘못했다고 다시 생각해달라고 계속 빌고 있었다. 분명히 남자가 바람을 피우고 여자가 이혼을 요구했을 것이다. 또 어떤 부부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는데 두 손을 꼭 잡은 모습이 뭔가 애틋한 사연이 있어 보였다. 또 다른 부부는 여자가 화장을 짙게 하고 남자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는데 누가 봐도 여자가 바람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우리 부부를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정호는 혼자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싸구려 감성에서 빠져나왔다. ‘지금 남들 시선이 뭐가 중요해. 어차피 잘못된 인연이라고 생각했으면 종지부를 찍는 게 맞아.’ 수정도 이혼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쪽팔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도 사람을 사서 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그러고 싶었다. 정호는 작성해온 서류와 작성 견본 서류를 대조해가며 맞게 작성했는지 확인했다. 수정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딴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서류를 접수했다. 접수창구 직원이 정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부인과 같이 오셨죠?”

“네.”

“대기자가 많아서 오후 2시쯤 되어야 합니다.”

“2시요? 오늘 다음 절차가 있나요?”

“네, 판사님 1차 심사가 있어요.”

“다음은요?”

“판사님이 조정 기간을 부여하고 기간 중에 반드시 해야 할 과제를 주실 거에요.”

“네.”

정호는 접수증을 받아들고 수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오후 2시에 다시 오라고 하네.”

“왜?”

“다시 오래. 판사 만나야 된데.”

“아이, 짜증 나.”

“어쩔 수 없지. 이혼하려면.”     

오후 두 시. 7호 법정.

정호와 수정은 법정 앞에서 기다렸다. 대기 순번대로 법정 안으로 들어가고 나왔다. 앞에 두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부부는 나란히 옆에 앉아 있었고, 다른 부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마치 혼자 온 것처럼 보였다. 첫 번째 부부가 대기 순번을 부르자 안으로 들어갔다. 5분 정도 걸렸을까? 바로 나왔다. 정호는 표정을 흘깃 쳐다봤다. 애써 무표정하려고 했는데 얼굴에는 후회라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두 번째 부부는 번호를 부르자 떨어져 있다가 문 앞에서 함께 들어갔다. 이번에는 10분이 걸렸다. 첫 번째 부부보다 시간이 두 배나 더 걸렸다. 정호는 순간 ‘재판 이혼이구나’라고 생각했다. 협의 이혼은 사전에 모두 협의가 된 상태이니 판사가 더 물어볼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호와 수정은 협의 이혼을 선택했고 사전에 재산분할과 모든 조건을 동의한 상태였다. 자녀 문제는 둘 다 모두 성인이라 특별한 해당 사항이 없었다. 두 번째 부부는 법정 문을 나서면서 서로 씩씩거리며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을 짙게 한 여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면서 상황을 보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호는 딱 봐도 견적이 나왔다. 분명히 상간남에게 전화하는 것 같았다. 다음 대기 순번을 불렀다. 정호는 수정을 쳐다봤다. 말은 없었지만, 정호가 앞장서고 수정이 뒤를 이어 법정으로 들어갔다. 

“거기 앉으세요.”

흰 머리가 듬성듬성 보이는 나이 지긋한 판사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판사의 말대로 자리에 앉았다. 

“두 분, 협의 이혼 맞나요?”

“네.”

“네.”

“협의 이혼 서류에 동의하셔도 조정 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에 보셔야 할 동영상도 있고요. 그걸 모두 하신 다음에 다시 오셔야 합니다.”

“네.”

“네.”

“그럼 3개월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일정은 행정 창구에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가셔도 됩니다.”

“네.”

“네.”

정호의 생각대로 협의 이혼은 5분이 채 안 걸렸다. 수정은 3개월 후에 다시 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복수 1단계를 진행할 뿐이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법원을 나와서 누가 먼저 갈라지자는 말도 없이 현관 앞에서 각자 갈 길을 갔다. 정호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아이들 모습이 떠올랐다. 군대 간 아들,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딸. 어떻게든 아이들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 수정에게 카톡을 보냈다. 

[당분간은 아이들이 몰랐으면 좋겠다.]

수정은 신호등에 걸려 차를 멈춘 상태에서 카톡 내용을 확인했다.

[알았으니까. 이제 톡 하지 마.]

수정의 답은 간결하고 단호했다. 그 대답 뒤에는 마치 이런 말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너는 이제 내 복수의 마수에 걸려들었어. 그냥 이대로 끝낼 줄 알았지. 내가 어떤 여잔지 보여줄게. 각오해. 난 이제 시작이야.’ 

작가의 이전글 좋은 시간, 나쁜 여자(2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