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조바르 Apr 21. 2024

좋은 시간, 나쁜 여자(23)

23. 양파와 거짓말

[현경의 오피스텔]

딩동딩동

철컥

“비밀번호 바꿨네?”

“정호 씨.”

“지영이구나! 이젠 네가 어떻게 부르는지에 따라 네가 누군지 알아.”

“그래. 그렇겠다. 저녁은?”

“아직. 배고프다.”

“마침, 된장찌개 끓이려던 참이야. 괜찮지?”

“그럼.”

“손 씻고 조금만 앉아 있어. 금방 준비할게.”

정호는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손을 씻으며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은 누구의 남자인지 헷갈렸다.

‘그래. 수정이하고는 끝났어. 첫사랑 지영이가 있잖아. 어차피 불륜을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이미 다른 남자와 잤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난 남은 인생을 수정이와 함께 할 수 없었어. 괜한 욕심을 부렸던 거야. 수정이가 그 젊은 남자와 관계를 하고도 나한테 태연하게 구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어. 잘했어. 다시 시작하면 돼. 힘내자. 김정호. 지금 너한테는 지영이가 있잖아.’

정호는 손을 씻고 나왔다.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맛있겠다.”

정호는 된장찌개 간을 보는 지영이를 뒤에서 안으며 말했다. 지영이는 정호의 백허그가 좋았다. 행복이란 이런 감정일까? 이 행복을 지키려면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금방 차릴게.”

지영이가 허리를 비틀며 정호의 손을 흔들자 정호는 더 세게 안았다.

“조금만 이렇게 있자.”

“찌개 끓어. 이따가, 밥 먹고 하자. 응?”

“알았어.”

정호는 지영이의 말에 팔을 풀었다. 지영이는 숟가락에 된장찌개 국물을 조금 떠서 정호의 입에 넣어줬다. 

“어때?”

“딱 좋아. 맛있어.”

“자기는 다 좋대? 내가 하면 다 좋은거야?”

“응. 그런가 봐.”

“호호호. 찌개만 식탁에 놔줘. 밥하고 반찬은 내가 가져갈게.”

정호는 이혼에서 오는 충격과 스트레스를 지금 지영이가 풀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남은 인생은 지영이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찬을 접시에 담고 있는 지영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수정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랑스러웠다. 신혼 초에는 수정이도 저런 모습이었었다. 살아온 날들이 다 불행하거나 이혼 사유가 되었던 건 아니었다. 이혼까지는 많은 갈등이 쌓여서 나온 결과였지만 본격적인 갈등구조는 1년 전부터였다. 수정이가 부부관계를 거부하고, 정호도 밖으로만 나돌던 시기에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커졌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정호에게 지영이가 말했다.

“뭐해? 내가 지금 자기 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고?”

“응, 잠깐 다른 생각 중이었어.”

“칫,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했다고?” 

“어, 사실은….”

“아니. 이따가. 일단은 밥을 맛있게 먹자. 그리고 이야기 하자.”

“그. 그래.”

지영이는 정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정호 씨. 난 자기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기편인 것만 생각해줘. 다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고마워 지영아.”

정호는 밥을 먹으면서 무언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지영이가 주는 안정감에서 나오는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호 씨. 자기가 꼭 들어야 될 이야기가 있어.”

“뭔데? 심각한 이야기야?”

“조금은….”

정호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지영이 눈을 바라봤다. 흔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눈망울이었다.

“현경이 영혼이 더 강해지고 있어. 내 영혼의 에너지가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야. 이대로라면 며칠 안에 내 영혼은 현경이 몸에 붙어 있을 수 없어.”

“그런 게 어딨어? 20년이 더 걸려서 당신을 다시 찾았는데.”

“미안해. 영혼의 세계는 갈때가 되면 저절로 사라질 수 밖에 없어. 그게 이 우주의 섭리거든. 그래서 말인데 나 세상에 당신과 나를 상징하는 표식을 남기고 싶어.”

“표식?”

“응. 사랑의 표식.”

“어떻게?”

“울릉도 갔을 때 그 모텔 창문에 있었던 거…. 기억해?”

“컵 속에 있던 양파 두 개?”

“그래. 양파 두 개.”

“그걸 어떻게 하려고?”

정호는 느닷없이 양파 두 개를 이야기하는 지영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자 지영이는 정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컵속에 양파 두 개를 넣어서 키우는 거야. 내가 없으면 당신이 키우는 거지. 양파가 많이 자라면 그걸 요리해서 먹고 다시 두 개를 키우는 거야. 그렇게 평생 말이야.”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그렇게 날 평생 기억해 주길 바래.”

“양파를 어디에 두고 키울까?”

“난 성스러운 장소에서 키웠으면 좋겠어. 신촌 성당 마리아상 앞에 놓고 키워줘.”

지영은 자신과 정호의 사랑이 한때 불장난 같은 불륜으로 남겨지기 싫었다. 특별히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지금 떠오르는 성스러운 장소는 신촌 성당이었다. 

“그래. 그럴게. 내가 그 약속은 꼭 지킬게.”

“고마워. 정호 씨.”

그 말과 함께 지영이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다. 정호는 깜짝 놀라 지영이를 안으며 눈을 떠 보라고 외쳤다. 그러자 지영이는 가늘게 눈을 뜨며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호 씨. 며칠은 갈 줄 알았는데. 이게 마지막일 것 같아. 다시는 당신 앞에 지영이는 나타나지 못할 거야. 저기 불빛이 보여. 눈이 부셔. 천사들이 나를 오라고 손짓하고 있어.”

“안 돼. 지영아. 가지 마. 제발.”

“고마웠어. 잘 있어. 사랑…, 해.”

지영은 고개를 떨구었다. 정호는 축 늘어진 지영이를 침대로 옮겨서 눕혔다. 심장이 뛰는지, 숨은 쉬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신체 활동은 정상이었다. 정호는 지영이가 더는 나타나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세상을 모두 잃어버린 것 같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현경이가 다시 나타나기 전에 지영이와 한 약속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장에 가서 양파 두 개와 유리로 된 물컵 두 개를 샀다. 신촌 성당으로 차를 몰았다. 성당 문은 열려 있었지만 예배가 없는 시간대인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당 본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맞은 편에 성모 마리아상과 단상이 보였다. 정호는 물컵에 정수기 물을 채우고 양파 뿌리를 물에 젖게 담갔다. 양손에 물컵을 들고 성모 마리아상이 있는 단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와 처음 만난 날부터 자신의 품 속에서 영혼이 꺼져갔던 순간까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성모 마리아상 앞에 물컵에 담긴 양파 두 개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님께 기도했다.

“마리아님. 지영이가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이승에서 고생만하고 간 사람입니다. 그녀의 영혼이 천국에서 편히 쉴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정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이 신부님이 그 모습을 보며 다가왔다.

“형제님. 무슨 사연이 있어서 슬피 우십니까?”

정호는 눈물을 훔치며 일어서서 신부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신부님. 저는 이 성당의 신자는 아닙니다. 오늘 하늘로 간 영혼의 마지막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양파 두 개를 놓고 우시던데 무슨 의미라도 있습니까?”

“네. 망자의 영혼이 남긴 유언입니다. 양파 두 개는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녀가 마지막 남긴 말이 신촌 성당 성모 마리아님 앞에 두고 잘 키워달라는 거였습니다. 죄송합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이렇게….”

“허허. 망자가 산자에게 인연의 끈을 놓지 말라고 했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제가 매일 찾아와서 그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양파를 돌보겠습니다. 신부님. 참 말도 안돼는 상황인걸 알지만 허락해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님 앞에 양파를 놓으면 누군가 치워버릴 겁니다. 단상 옆쪽에 다른 꽃들과 함께 놓아 두시죠. 꽃을 관리하시는 분께는 제가 말해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정호는 연신 감사의 말을 하고는 성당을 나섰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정호는 벨을 눌렀다. 지영이에게 비밀번호 바뀐 걸 물어볼 틈도 없었다. 안에서 문 앞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아저씨. 밥 먹다가 어디 갔다 왔어요?”

현경이였다. 한 사람의 몸에 두 사람의 영혼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바람에 혼란스러웠는데 이제 남은 영혼은 현경이 영혼 뿐이었다. 결국 자기 몸을 찾은 것이었다.   

“어, 내가 밥 먹다가 나간 걸 어떻게 알았어?”

“식탁을 보면 알죠. 밥 두공기에 숟가락, 젓가락 두짝. 그러니 두 사람이 밥을 먹었다는 건데, 여기를 오는 사람은 아저씨밖에 없으니까 당연히 밥 먹다가 어디 갔다왔냐고 물을 수밖에요.”

현경이 말이 맞았다.

“그래, 현경아. 참. 학교는 언제부터 가니? 입학식은 언제 하고?”

“일단 기숙사에 먼저 들어가요. 송도에 있는 기숙사에 무조건 다 들어가야 돼요.”

“기숙사? 송도?”

“네, 1, 2학년은 송도 캠퍼스에서 공부한대요. 3,4학년은 신촌 캠퍼스에서 다니고요.”

“그래? 입학식은?”

“입학식은 신촌 캠퍼스에서 하고요.”

“그래. 좀 복잡하구나.”

“아뇨. 하나도 안 복잡해요. 신나는걸요.”

“그래. 기숙사 들어갈 때 아저씨가 태워줄게.”

“고마워요. 아저씨. 나의 키다리 아저씨.”

정호는 현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영이를 떠올렸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 얼굴에 지영이 목소리였는데 이제 현경이로 바뀌었다. 

“아저씨. 뭘 그렇게 멍하게 생각해요?”

“아니야.”

“제가 또 기절했었죠. 그래서 그런거죠?”

“응, 그래. 그런데 이제 기절할 일 없을거야.”

“엥? 뭔말?”

“네 몸속에 있던 다른 영혼….”

“아, 아저씨 첫사랑 영혼 말이에요?”

“응, 그 영혼이 이제 영원히 갔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거야.”

“그래서 울적하신거구나!” 

“이제 제가 기절할 일은 없겠네요? 그래서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구나. 아저씨에겐 슬픈 일이지만 제게는 좋은 일인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지. 원래 네 몸이었으니까…. 누군가 들어와서 빌린다는 건 말이 안돼.”

정호는 지영이가 차려준 마지막 밥상을 마저 먹었다. 현경은 그런 정호를 바라보며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이젠 첫 사랑 그녀를 잊어버리세요. 대신 제가 딸 노릇 잘 할게요. 호호.”

“딸? 그래. 좋네. 딸이라.”

정호는 왠지 낮설지 않은 딸이라는 표현에 웃음을 지었다. ‘그래. 지영이는 보내주자. 대신 지영이가 부탁한 양파는 잘 키워야지. 그리고 현경이를 딸처럼 생각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