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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May 05. 2024

좋은 시간, 나쁜 여자(25)

25. 미안해, 미워해, 사랑해

아들 성주가 전역하는 날이 다가왔다. 정호는 민원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디리리릭 디리리릭     

“그래, 성주야!”

“아빠, 다음주 월요일 나 전역.”

“알지, 아빠가 메모해놨지.”

“그날 부대앞으로 데리러 올 수 있어요?”

“몇 시에 나오니?”

“아침 여덟 시 삼십 분에 신고하니까 그때까지만 오시면 되요. 근데 너무 이른 아침이라 시간 안 되시면 그냥 버스 타고 갈게요.”

“아니야, 갈게. 엄마랑 누나랑 같이 다 데리고 가족여행 한번 하지 뭐.”

“역시, 아빠는 여전히 사랑꾼. 아빠 최고.”

“자식, 고생했다. 마지막 날까지 몸조심하고,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가라고 했어. 매사에 조심하고.”

“알았어요. 엄마한테도 전화할게요.”

“아니, 엄마는 아빠가 말할테니까 놔둬라.”

“엄마 목소리 듣고 싶어서 그런건데.”

“그래. 그럼, 해보던가.”

“둘이 또 싸웠어요? 좀 이상한데? 촉이 와요 촉이.”

“싸움이 되기나 하니? 싸울 일도 없고.”

“하하하, 아빠 진짜인가 보네. 굳이 해명을 다하고. 알았어요. 전역하는 날 뵈어요. 충성!”     

정호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당분간은 아이들이 이혼 사실을 모르게 하자고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수정에게 전화를 하려고 핸폰 저장 이름을 검색하다가 손이 멈췄다. 습관적으로 자연스럽게 하던 행동이었지만 의식적으로 불편함이 동작을 멈추게 했다. ‘성주가 엄마한테 전화한다고 했으니까.’ 대신 딸을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사랑하는 딸 김혜연’ 통화버튼을 눌렀다. 통화연결음에 Lady Gaga의 ‘Always Remember Us This Way’ 노래가 들렸다. 성주가 군대 가기 전 영화관에서 본 영화 <Star is born>의 주제곡이었다. 갑자기 울컥 눈물을 쏟고 말았다. 좋은 부모 역할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에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나중에라도 딸이 알게 되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디리리릭, 디리리릭, 사랑하는 딸 김혜연!

“그래, 혜연아.”

“아빠는 왜 전화했다가 끊어? 받으려는데 끊어졌어.”

“어, 그랬구나.”

“아빠, 목소리가 왜 그래? 울었어? 무슨일 있어?”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어제 술좀 마셨거든.”

“아빠가? 술을? 엄마한테 혼났겠네?”

“아빠가 얘냐? 엄마한테 혼나게.”

“술 많이 마시면 엄마가 가만있지 않을텐데? 그건 그렇고 왠일? 아빠가 이시간에 전화를 다하고?”

“어, 성주가 다음 주 월요일 전역하잖니. 아침 일찍 델러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가족 모두 간다고 했어. 시간 낼 수 있지? 모처럼 가족여행한다고 생각하고 같이 가자고.”

“당연히 오케이지. 알았어. 안 그래도 토요일에 집에 가려고 했어.”

“그래. 토요일 집에서 보자. 용돈은 있고?”

“항상 부족하지. 아빠가 주는 건 엄마한테 말 안하는 센스. 졸업하고 취직하면 내가 아빠 용돈 줄게. 지금은 투자라고 생각해. 호호호.”

“큰소리는. 알았다. 토요일 보자.”

“아빠, 사랑해.”     

정호는 혜연의 ‘아빠 사랑해’라는 말에 행복한 가정의 틀을 깬 자신이 싫었다. ‘조금만 더 참았어야 했나?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바람 핀 여자랑 어떻게 남은 인생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겠어. 아이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남은 인생을 불행하게 살 수는 없어.’ 정호는 수정이 젊은 남자와 호텔에 들어가는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호텔 방에서 저질렀을 장면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백수정, 미안하지만 당신이 다른 남자랑 그 짓을 했다는 걸 용서할 수 없어. 키스만 했다면 모르겠지만 섹스는 용납 못 해.’ 손발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는 사이 핸드폰도 부르르 떨리며 울렸다. ‘지혜롭고 예쁜 백수정’이라고 저장된 이름이 떴다. 이혼하고도 아직 저장명을 바꾸지 않았다. 아니 건드리기도 싫었다.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여전하네. 전화 늦게 받는 건.”

“당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잖아?”

“하긴. 그렇지. 성주랑 통화했지?”

“그래.”

“왜 일방적으로 가족여행 이야기를 했어? 벌써 후회하는 거야? 다시 잘 해보자고 그러는 거 같은데 어림없어.”

“당분간 아이들이 모르게 하자고 했잖아. 당신…. 아니, 그쪽도 동의한 걸로 기억하는데.”

“하, 그쪽? 그래, 뭐, 이혼했으니까 남남이지. 어쨌든, 왜? 마음대로 가족여행 간다고 했냐고? 내 스케줄도 있는데.”

“그럼, 나랑 혜연이랑 갔다올테니까 넌 빠져도 돼.”

“그럴 순 없지. 나만 나쁜 엄마 만들려고?”

“백수정. 너랑 싸울 기분 아니니까, 가고 안가고는 네가 알아서 결정해. 난, 상관없어. 그리고 혜연이, 토요일 집에 온다고 했으니까 나 집으로 들어 갈 거야.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안 가고.”

“그렇게 자식들 생각은 끔찍하면서 나 한테는 왜 그랬어?”

“뭘?”

“한 가지만 물어보자. 이혼하기전에 물어 보려고 했다가 못 물어봤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꼭 물어봐야 겠더라고.”

“뭔데?”

“그 어린얘랑 하니까 좋았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해. 어린얘라니?”

“걔 사랑했니? 아니, 지금도 사랑해?”

“웃긴다. 그게 그렇게도 물어보고 싶었어?”

“사랑했냐고? 그 말만 대답하면 돼.”

“사랑했다면 어쩔거고, 안 했다면 어쩔건데?”

“대답 잘 해라. 너 한테 주는 마지막 기회니까.”

“누가 누구한테 기회를 줘? 넌, 아직도 네가 한 짓을 생각 못하는구나? 난, 네가 젊은 놈이랑 호텔에서 그 짓을 한 것만 생각해도 치가 떨려. 네가 뭔데 기회를 주고 말고 그래. 넌 그럴 자격도 없어. 이제와서 그런 말로 괜히 감정 상하지 말자. 이혼했으면 깨끗하게 끝난 거야. 아이들 상처 주지 말자고 그러는 건데 우리 이야기는 더 하지 말자. 제발.”

“알았어. 사랑이 아니라고 말 못하는 걸로 생각할게. 토요일 집으로 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연기나 잘해.”     

수정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면 복수계획을 다시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외도를 했지만 사랑은 아니었기에 남편도 그러기를 바랬다. 하지만 정호는 끝내 수정이 원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수정과 정호는 통화를 마치고 나서 다시 감정이 격하게 끓어 올랐다.     

월요일 아침, 간만에 가족이 모였다. 정호가 운전하고 혜연이가 앞에 타고 수정은 뒷좌석에 앉았다. 평소 같으면 아빠 엄마가 나란히 앞에 탔는데 딸은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랑 싸웠어?”

“아니야, 회사일로 피곤해서 그래. 앞에 앉아서 졸고 있으면 아빠 운전하시는 데 방해되잖아. 오늘은 네가 아빠 졸음운전 안 하게 잘 챙겨라.”

“알았어.”     

혜연이는 학교생활 이야기, 친구 이야기로 잠시도 쉬지 않고 쫑알댔다. 정호는 오랜만에 듣는 딸의 수다에 행복했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수정은 뒤에서 조용히 부녀지간의 대화를 들으며 자신이 무슨 짓을 했고, 앞으로 무슨 짓을 하려는지 생각하자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미워해, 사랑해. 그런데 이미 늦었어. 당신은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잖아.’      

08시 30분. 강원도 화천군 7사단 수색대대 위병소 앞.

전역하는 병사들이 저 멀리 연병장을 가로질러 나오고 있었다. 정호와 수정, 혜연은 십여 명의 병사 무리 중에 성주를 찾으려고 까치발을 하며 살폈다. 혜연이가 제일 먼저 알아봤다.     

“아빠, 저기. 성주. 제일 오른쪽에 있네. 우리를 봤어. 손 흔들잖아.”

“맞네. 제일 오른쪽.”     

이번에는 수정이 손을 흔들며 “성주야! 여기!”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이, 엄마는. 그렇게 안 불러도 쟤 우리 봤어. 손 흔들고 있잖아.”

“반가워서 그러지.”     

정호는 수정, 딸, 아들을 차례로 보며 이 순간 만큼은 행복했던 가정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들을 바라보며 뛸 듯이 기뻐하는 수정을 보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조용한 울림의 소리를 들었다. ‘가정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불륜은 용납못해, 그래도 지금 만큼은 다시 사랑해.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다시 완전체가 된 가족. 강원도 화천 북한강변을 달리는 차 안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성주는 바로 복학해서 2년 후배들과 같이 대학 생활을 한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아빠, 복학하면 제일 먼저 여자 친구부터 만들고 싶어.”

“뭐야? 여자 친구?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벌써부터 여자친구 타령이야?”     

수정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자 정호가 거들었다.     

“김성주, 엄마를 배신하면 안 되지. 엄마는 너 제대하면 같이 보낼 거 많이 생각해뒀는데.”     

정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수정은 왠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딸 혜연이도 거들었다.     

“야, 벌써부터 연애할 궁리부터 하냐? 요즘 여자얘들은 예비역 안 좋아해. 특히, 선배라고 나이 많은 대접 받으려고 하면 완전 아웃이야.”

“하하하, 그 정도는 벌써 알고 있지. 암튼, 송도에서 제대로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럴거야. 군 생활하면서 유일한 낙이 그런 상상하는 거였거든. 누나는 모를거야.”     

정호는 아들의 송도 생활이라는 말에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현경이가 아들과 같은 과이고, 성주가 2학년에 복학하면 같은 학년이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연애부터 하겠다고 하니 예쁜 현경이를 좋아하기라도 한다면…. 운전대를 잡고있는 팔과 다리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아니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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