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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Jun 10. 2024

카레 이야기

딸아이의 기억 속에 내가 있다는 안도감

주말에도 학원에 가야 하는 딸아이는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아내는 그런 딸아이에게 뭐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은 마음에 덩달아 분주하다.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한 술 뜨러 거실로 나오던 딸아이가 “오! 아빠 카레 냄새네? “ 한다. 나는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리고 있지만, 괜히 기분이 좋다. 아이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고 와이프와 단둘이 집에 있었던 어제,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보겠다며 카레를 만들었다. 조금 특별한 “아빠표 카레”를.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신 카레에는 온갖 네모난 것들로 가득했다. 감자, 당근, 양파, 돼지고기 등과 어우러진 카레 소스는 약간 매콤하면서도 특유의 풍미가 있어서 왠지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였을까? 학교나 성당에서 수련회를 가면, 2박 3일의 식단 중에 빠지지 않았던 메뉴도 바로 카레라이스였다. (또는 짜장밥) 물론, 단체로 모인 어린아이들의 까다로운 취향을 맞추기에 이만큼 간편한 메뉴도 없었을 테고.


와이프와 연애를 하던 200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에 인도 음식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카레를 난이라고 불리는 구운 빵과 함께 먹을 수 있었는데,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신 카레와 전혀 다른 음식이었지만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세상에 비슷하면서도 다른 음식이 어디 한둘인가? 정작 나를 놀라게 한 카레는 따로 있었는데, “뿌팟퐁커리”라고 불리는 그 음식을 나는 태국 음식점에서 처음 맛보게 되었다. 나의 카레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엄밀히 말해, 뿌팟퐁커리는 카레라기보다는 카레를 베이스로 한 크랩 요리이다. 기름에 튀겨낸 게(소프트쉘크랩)가 코코넛밀크 향 가득한 부드러운 카레에 버무려져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인도 음식점에서 맛본 정통 카레보다 코코넛밀크 향이 가져다주는 이국적인 풍미가 훨씬 좋았다. 또한, 맛이 자극적이지 않고 부드러워서 어린 시절 우리 아이들도 좋아했다. 나는 때때로 취미 삼아 직접 요리를 했는데, 집에서 쉴 때나 아이들과 캠핑을 다닐 때 이 뿌팟퐁커리(엄밀히 말하자면 게 튀김이 빠진 뿌팟퐁커리)를 종종 만들었다.


아빠표 카레의 필수 재료 (코코넛밀크, 양파, 계란)


시중에서 게를 사서 껍질까지 씹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게 튀겨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대신, 코코넛밀크와 양파, 계란 정도만 있다면 뿌팟퐁커리 못지않은 훌륭한 카레를 만들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양파인데, 양파는 길고 얇게 채를 썰어 식용유를 붓고 갈색으로 변할 때까지 볶아내야 한다. 여기에 샤부샤부용 고기와 실파를 넣어 한 번 더 볶아주고, 코코넛밀크와 시판 카레, 약간의 물을 더해 잘 저어주면 카레는 어렵지 않게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계란을 풀어줘야 하는데, 이 때는 불을 조금 약하게 조절해야 한다. 강한 열기에 계란이 너무 단단하게 익어버리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카레와 섞여야 부드러운 식감이 제대로 살아나기 때문이다.




딱히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아빠 카레를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어 식탁 옆 정수기로 향한다. 10여 년 전,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라는 표정으로 나의 카레를 맛있게 먹던 꼬맹이가 벌써 고등학생이라니. 훌쩍 커버린 외모만큼이나, 서먹해진 부녀 사이도 낯설다. 그래도 음식 먹을 때 “맛있다” 소리를 중얼거리는 귀여운 습관은 여전하네. “아빠 카레”를 기억해 준 아이가 고마운 나는, 어느새 다시금 기억을 더듬고 있다. 카레 말고 또 뭐가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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