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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Aug 25. 2022

나의 경비 아저씨

특별한 인연과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아쉬움

내가 처음 장기 두는 법을 배운 곳은 경비실이었다.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우리 식구는 부천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 얹혀살게 되었다. 하던 일이 영 시원찮게 되어버린 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우리 형제를 이끌고 호기롭게 본가의 문을 두드렸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짜리 아파트. 게다가 오직 한 개 동밖에 없는,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아파트였다. 어쨌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여동생인 나의 고모가 맡겨놓은 손주를 돌보던 할머니가 지내던 그 집은 우리 식구 때문에 무척이나 비좁아졌다.


게다가,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할머니는 아버지의 친모가 아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할머니는 느닷없이 식솔들을 잔뜩 데리고 들어온 우리 아버지가 못마땅했고, 어린 우리 형제 또한 전혀 귀엽지 않았으리라. 졸지에 시집살이와 더부살이를 한꺼번에 하게 된 어머니는, 생활비라도 보태야 한다며 일찌감치 일자리를 구해 이른 아침부터 아버지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렇게 해서 나와 동생은 이 애매하고도 냉랭하면서 낯선 공간에서 유년 시절의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불편한 집안의 공기는 자연스레 나를 집 밖으로 이끌었다. 누구도 나가라 하지 않았지만, 학교에 다녀오면 동생의 손을 잡고 아파트 주변을 맴돌았다. 텅 빈 놀이터와 인근 공사장까지 한 바퀴 돌고 나서도 집에 들어가기 망설여지던 어느 날인가는, 아파트 입구에 위치한 경비실을 기웃거렸다. 어린 내가 딱하게 보였을까? 아니면 당신도 무료했던 것일까? 경비 할아버지는 선뜻 경비실의 문을 열어 누런 장판이 깔린 한쪽 자리를 나에게 내어주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경비 할아버지와 제법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경비실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 경비 할아버지는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전래동화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살짝 지어낸 듯 한 옛날이야기들. 살곶이 다리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비가 주룩주룩 오던 어느 날인가는 무료해하던 내게 장기 두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 뒤로 나와 경비 할아버지는 종종 장기판을 펼쳐두고 마주 앉았다. 그렇게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문지방이 닳도록 경비실을 들락거리는 사이, 어느덧 우리 가족의 고단한 더부살이가 끝났다.


아버지의 새로운 일자리를 따라 이사한 대단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나와 동생은 신이 나서 방방 뛰어다녔다. 그리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새로운 아파트의 경비실을 찾아다니며 기웃거렸다. 하지만, 단지 내 곳곳에 위치한 경비실의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고, 경비 아저씨들은 다들 바쁜지 내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 사실이 너무도 낯설었던 나는, 우리 식구가 고단한 더부살이를 하던 그 이상한 아파트가 그립다는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켜야 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가끔 Fred의 얼굴이 떠오른다. 커다란 곰을 연상시키는 체구와 갈색 피부에 늘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는, 내가 일하는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의 Security였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그는 나를 “My brother”라고 부르며 손을 번쩍 들었고, 그와 주먹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간혹 로비를 오가며 그와 마주칠 때면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랬던 그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모두 코로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문득 내가 어릴 적 그 이상한 아파트의 경비 할아버지와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눴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년 전, 아파트 주차장을 나서는 나를 향해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건네던 경비원 분을 보면서 느꼈던 내 감정이 “섭섭함”에 가까웠던 이유는, 어쩌면 내게 특별했던 인연과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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