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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 May 27. 2023

부모가 되면 더 행복할까

집 2층 가장 안 쪽에 있는 조용한 방에서 이제 막 9개월이 된 아이가 자고 있다. 암막 커튼으로 창을 가린 방에는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다. 아이 침대 맡에 둔 백색 소음기에서 파도를 닮은 소리만 들린다. 침대 옆에는 내가 대학원생일 때 쓰던 작은 책상이 있다. 책상 위엔 논문 대신 아이의 기저귀와 물티슈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새벽 6시 아이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1층에 있는 침실에서 자고 있던 나는 침대 맡에 둔 아이 모니터를 집어 들고 아이가 일어났음을 확인한다. 무거운 몸을 끌고 침대에서 나와 잠옷 차림으로 2층 아이 방을 향해 계단을 올라간다. 아이 이름을 부르며 아이 방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여느 때와 달리 아이는 나를 향해 웃지 않고 목청이 터져라 울고 있다.


아이의 기저귀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아이를 안아 올린다. 아이를 품에 꼭 안고 1층으로 내려와 주방을 향해 걸어간다. 거실을 향해 있는 검정 대리석 상판 아일랜드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내가 아이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올 동안 어른의 아침 식사인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고, 이제 막 아이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미리 얼려 둔 아보카도, 쌀밥, 쇠고기를 녹여 비빔밥을 만들고, 소금을 넣지 않은 스크램블 에그에 브로콜리를 섞어 이유식을 만든다. 그동안 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주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아이에게 말을 건다. 아이의 아침이 왜 언짢았는지, 내 품에서 내려놓으면 왜 우는 건지 알 수 없다. 이제 막 9개월이 된 아이는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내게 알려줄 수 있을 만큼 컸지만,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알려줄 만큼 자라진 않았다.


남편이 서둘러 아침식사 준비를 끝낸다. 아이를 아이 의자에 앉히고 남편과 나도 식탁 의자에 앉는다. 이유식을 한 숟가락 떠서 아이 손에 쥐어주는데 한입을 먹자마자 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운다. 6개월에 이유식을 시작하고부터 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밥을 잘 먹었는데 오늘은 왜 우는 걸까. 여전히 알 수 없다. 허기져 우는 줄 알았는데. 남편이 유축해 둔 모유를 먼저 줘볼까 하고 묻는다. 우유를 먼저 먹으면 아침 음식을 덜 먹을 텐데 하는 걱정을 이야기한다.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하자 남편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이가 칭얼거린다. 혼자 결정을 못하는 남편에게 정당하지 않은 짜증이 난다. 아이가 있으면 삶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고, 걱정해야 하는 사소한 일이 쌓이고, 그 와중에 때론 이상적이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하고, 내일도 오늘이 반복될지 걱정을 하고, 그러면 내일은 어떻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문다.


남편이 아이를 안아 침실로 간다. 침실에 있는 독서의자에 앉아 젖병을 물린다. 책을 읽으려고 산 이 아늑한 의자는 이제 아이 젖병을 물리기 위해서 사용된다. 이제 각을 잡고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사치를 부릴 시간이 없다. 지적 사치로 읽는 책은 시간의 틈에서만 읽는다. 젖은 머리를 말리면서 태블릿으로, 자동차 정기 점검이 끝나길 기다리면서 휴대전화로, 운전을 하면서 오디오북으로. 아이는 남편이 주는 젖병을 물고 울음을 그친다. 세수하지 않은 잠옷 차림으로 나는 허기지다고 생각한다. 이제 겨우 오전 6시 15분이다.


아이가 없었던 2년 전 고려대학교 방문연구교수로 1년 간 일을 하면서 잠시 한국에 돌아가 살았던 적이 있다. 혼자 살던 동생의 아파트 방 셋 중 하나를 빌려 살면서 신촌에서 고려대학교로 출퇴근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방에서 나와 넓은 주방에서 내 손으로 스크램블 에그를 조리하고 식빵을 토스터로 익힌 뒤 피넛버터와 잼을 발라 먹으면서 책을 읽거나 동생과 이야기를 했다. 동생의 하얀 하이웨이스트 스커트를 빌려 입고 작년에 산 하늘색 셔츠를 골라 입고 하얀색 힐을 신었다. 같은 방향에 있는 회사에 다니는 동생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했다. 출근을 하면서 어떤 날은 각자 책을 읽고, 어떤 날은 전 날 있었던 이야기, 오늘 있을 이야기를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연구실로 걸어가는 15분 동안 미국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다. 남편은 그 때면 저녁 시간이라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곤 했다. 그렇게 남편의 하루 일상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 헬스장이나 필라테스 스튜디오에 들려 운동을 했다. 운동을 하고 15분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매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코로나가 생기는 바람에 미국 비자문제가 지연되어 생각보다 더 오래 남편과 잠시 떨어져 있었만, 그동안 우리는 더 가까워졌고, 나는 내 시간의 자유를, 내 몸의 자율성을, 선택의 결정권을 온전히 누리고 있었다. 아이가 있는 지금보다 확실히 나는 더 행복했다.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덜 행복하다. 백 여개에 가까운 연구 논문을 메타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아이가 있는 부모는 점점 더 자신의 삶과 (b = -. 19), 결혼생활에 덜 만족한다 (d = -. 19, r = -. 10). 남편과 나는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한 달에 한 번도 채 싸우지 않았다. 작년 아이를 낳고 우리는 자주 싸웠고, 싸울 때면 서로에게 더 뾰족한 말을 더 자주 다. 다른 한 연구는 내가 사는 미국에서 아이를 가질 때 특히 불행해진다고 이야기한다. 아이를 낳은 지 몇 주가 막 지났을 때 아이를 안고 하루 종일 침대에서 지내면서 불행했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수유를 하고 아이를 재웠는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깨서 우는 아이를 안아 또 수유를 하며 침대에서 뛰쳐나가, 방문을 열고, 대문을 열고, 집 앞뜰에서부터 골목의 저 끝까지 소릴 지르며 달리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에 휩싸였다. 아이가 조금 더 커 어린이집에 가면서 내 삶의 자율성을 되찾았을 때 조금 덜 불행하고 조금 더 행복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가 아파 어린이집에 가지 못하고 남편도 아파 침대에 누워있을 때, 일을 해야 하고 논문을 써야 하는데 컴퓨터 전원조차 켜지 못한 그날, 아이 낮잠을 재우고 아이 방에서 나와 잔뜩 어질러진 주방과, 아이 음식이 떨어진 식탁과, 남편이 제자리에 걸어 두지 않은 아이 어린이집 가방을 보고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다시 불행해진 것 같았다.


어느새 저녁 6시 15분이다. 나는 다시 허기지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생긴 뒤로 허기짐을 느껴도 배가 고플 때 바로 밥을 먹을 수 없다. 해가 잘 드는 창문이 있는 화장실의 커다란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는다. 욕조에 화씨 100도로 온도를 맞춰 물을 받고, 옷을 벗고, 아이를 품에 안고 욕조 안으로 물속으로 함께 들어간다. 아이에게 비닐로 만들어진 작은 소리가 나는 욕조용 아기 책을 주고 아이가 책을 가지고 노는 동안 아이의 작은 몸을 씻긴다. 15분 만에 아이의 몸이 깨끗해진다. 아이의 윗니 옆의 이 두 개가 동시에 나고 있는 게 보인다. 이래서 아침을 못 먹고 울었구나. 남편이 욕조에 있던 아이를 안아 올려 침실로 데려가 침대 위에 앉힌다. 남편이 커다란 수건으로 아이 몸의 물기를 닦고 부드러운 피부 위로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린다. 그동안 아이는 미소를 짓기도 하고 소리를 내어 웃기도 하고 신이 나 몸을 들썩이기도 한다. 나는 내 몸의 물기를 닦고 옷을 챙겨 입고 아이의 빗을 챙겨 들고 아이 옆에 와 조용히 앉는다. 아이를 마주 보고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를 빗는다. 아이 뒤통수에 있는 머리를 빗기느라 아이를 안는 형세가 되었는데 그 순간 내가 자신을 안는 줄 알았던 아이가 나를 꼭 껴안아준다. 남편이 감탄하는 목소리로 아이가 큰 미소를 짓고 있다고 한다. 그 순간 그전에 그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깊은 사랑의 감정이 이 작은 타인을 향해 가득 찬다.


며칠 전에 뉴욕타임스의 아주 작은 사랑 이야기(tiny love stories)라는 코너의 글을 읽고 이 작은 아이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글의 화자가 이야기한다.

"나는 우리가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두 남자아이를 낳았어요. 그녀가 아이를 낳은 뒤 몇 년 후, 아이들이 집을 나설 때면 내가 점심을 싸서 아이들 손에 쥐어주었어요. 나는 학부모상담날 학교에 가서 두 아이의 선생님을 만났고, 파이 데이를 위해 애플파이를 구웠고, 아이들의 야구 경기와 공연을 보았고, 유니폼을 빨았고, 두 아이의 대학 졸업식에서 눈물을 흘렸고, 첫 손자를 내 팔에 안았어요. 나는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이 두 아이들이 아기였을 때 모습을 내가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나는 이 아이들이 십 대 소년이고 다 자란 청년일 때 그 모습을 그녀가 알았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나의 남편의 사별한 아내인 그녀가 우리 모두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 샬롯 마야

아이를 낳기 전에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어린아이들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이제는 다른 아이를 보고 그 안에서 내 아이를 발견하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가 있는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적이 더 많지만 예전에 느낄 수 없는 다른 종류의 행복을 알게 되었다. 아이가 나를 안아줄 때 나는 이 전에는 몰랐던 종류의 사랑을 느낀다. 내 삶은 조금 더 불행해졌고 행복이 조금 더 줄어들었지만, 대신 행복의 종류가 더 다양해졌고 다른 사람들의 삶과 불행과 고통에 더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고통은 기쁨과 떨어뜨릴 수 없다는 말의 뜻을 내 방식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로 깊은 사랑과 타인을 향한 애틋한 감정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비록 그것이 더 많은 행복이나 더 많은 쾌락이나 더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지 않더라도 새롭고 깊고 확장된 삶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많은 연구가 아이가 태어난 뒤 내가 덜 행복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진심으로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내 세상에 들어온 뒤로 나는 걱정이 늘었고, 남편과 다툴 일이 더 늘었고, 아이가 울면 나는 초조하고 덜 행복해진다.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걱정, 스트레스, 불안은 낮은 행복과 관련되어 있지만 동시에 더 높은 삶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연구에서 행복은 무언가를 받는 사람들에게 더 높게 나타났지만, 삶의 의미는 무언가를 주는 사람들에게서 높게 나타났다. 그는 삶의 의미는 행복과 다르며, 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침실 창으로 해가 지는 모습이 보인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다. 서쪽을 향한 창으로 해가 길게 침대 끝까지 들어와 아이와 나를 비춘다. 아이의 보드라운 피부가 햇살을 받아 빛이 난다. 아이가 나와 눈을 맞추고 환하게 웃는다. 자신의 머리를 빗어주는 나를 아이가 양팔로 꼭 안아준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너무 많이 행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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