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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eong Mar 02. 2022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데이터'는 무엇입니까.

<세상을 읽는 새로운 언어, 빅데이터 / 조성준> 리뷰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관계, 즉 빅데이터가 인공지능 머신러닝의 재료이고 인공지능은 빅데이터를 의사결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사이트로 변환해주는 도구라는, 이 둘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들어가는 글>




리뷰 >


알맹이가 없지만, 어딘가 있을 알맹이를 찾는 방법조차 알려주지 않은 불친절한 책입니다.


사주팔자를 알고 계십니까? 살아갈 운명을 감히 예측해보는 행위 말입니다. 수 세월을 살아온 운명 데이터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인사이트를 제공하지요. 사주와 빅데이터를 비교한다라, 과감한 비약입니다. 하지만 관계없어 보이는 이 둘은 세계의 불안에 어느 정도 질서를 부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교집합이 있을 듯싶습니다. 


얼마만큼 커져야 빅데이터의 ‘빅’이란 뜻이 통할까요. 단순히 데이터의 양만으로는 빅데이터가 될 수 없다 합니다. 빅데이터가 되기 위한 특정 기준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전문가가 아니니, 정보성 글을 남기기는 건 이쯤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적절하게’ 거대해진 정보는 어떤 식으로 활용될까 궁금해졌습니다. 얼마나 커야지만 세계의 혼돈을 가리고 질서가 부여될 수 있을까요. 한계에 부딪히지는 않을까요. 모이고 모인 무한한 데이터를 어디에 기록해둘 것이며,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 이를 포괄할 기술발전이 어디까지 이루어질 수 있을지,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이런 궁금증은 미래를 향한 기대심에 기반한 것일까요, 두려움에 기반한 것일까요. 


저는 두렵습니다. 질서에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에너지가 갈려 들어갑니다. 대상을 제 알맞은 자리에 놓으려 하는 모든 시도는 세계에 작위적인 모눈을 수없이 새겨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아날로그, 연속된 세계에 금을 긋는다는 건, 적절히 분배되어야 할 스트레스를 한곳에 집중시키는 행위입니다. 마치 과자봉지를 쉽게 까기 위해 홈을 새겨놓듯, 집중된 스트레스점은 세계를 손쉽게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은 안돼, 멈춰야 한다는 주장은 또 아닌 것이 우리는 빅데이터를 포함한 기술발전의 혜택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정보통신의 기술로 앎이 다양해진다면 앞서 이야기했던 기준과 한계, 제 자리를 정하는데 조금 더 현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자문자답 >


Q. 깨달음엔 반드시 '데이터'가 필요할까요?


보편적으로 '데이터'란 기억은 인간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데이터가 반드시 전산상에서만 다뤄지는 단어라고 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인간의 깨달음과 데이터와의 관계, 이 둘의 관계를 상정하기 위해선 '데이터'라는 의미를 적용될 만한 범주로 이전시켜야 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데이터'란 단어의 주 쓰임새는 '기억' '저장'과 흡사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 깨달음엔 반드시 기억이 필요할까요? 


"What is X?"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랜 사유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에 대한 사유는 감히 제가 다룰 수 없는 문제기에 통용되는  표현적 의미만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깨달음과 강력하게 연관된 관념은 진리입니다. 다시 질문을 바꾸어 봅니다. 진리에 도달하려면 기억이 필요할까요?


애초에 진리는 도달하는 것이 아니란 사고방식을 가진 저는, 이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객관적 진리는 고사하고, 주관적 진리에 도달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주관적 진리는 자기 확신에 가까운데, 자기 확신에 이르는 과정엔 반드시 경험이 선행되어야 할 겁니다. 직접 살을 부딪히고 느끼는 것이 경험인데, 경험은 추상적인 기억으로 희미하게 남아 삶의 태도에 영향을 미칩니다. 경험은 자기 확신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기억을 낳으니, 이젠 자기 확신과 기억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소 논리적 오류가 있더라도 용서해주세요.


깨달음은 자기 확신으로, 데이터는 기억으로 바꾸어야 그럴듯한 결론이 나올 듯싶습니다. 자기 확신을 위해선 반드시 기억이 필요할까요? 아뇨, 저는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지 않습니다.  


본인이 경험주의자, 즉 경험 없는 앎이란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자에게는 위 질문이 다소 뻔한 것으로 다가올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경험주의의 맹신은 의외의 반례에 무너지곤 하는데,  그것은 선험적 경험 또한 우리 삶에 분명 존재한다는 겁니다. 읽고 듣고 느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경험주의의 반례, 즉 선험 또한 우리 삶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믿음의 영역이네요. 


선험적이니, 반례라던지 하는 수사적 논리는 되도록이면 쓰지 않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위의 대답에 대한 근거로 사용한 이유는, 답답해서였습니다. 글로나마 남기지 않았다면, 근래들어 앓고 있는 원인모를 불안이 심화되어 저를 더 고통스럽게 할까 두려웠습니다. 


사유하기 싫은 우리 인간은 보통 주관적 진리를 이런 식으로 형성하는 듯싶습니다. 많지 않은 명제들이 어설프게 연결되어 자기 확신으로 굳어지죠. 결국 수많은 공리, 결론들이 자신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설픈 자기 확신으로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읽고 말하며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글을 쓰며, 다시 보고 또다시 고치며 자신만의 논리를 꽤 명료하게 적립할 수 있습니다. 사유 흐름의 또 다른 결론은 글쓰기를 즐거운 것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단 말을 전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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