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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eong May 15. 2022

마음에 들도록

<라면을 끓이며 / 김훈> 리뷰

무겁지 않은 글을 읽고자 했다. 그래서 선택한 산문이었다. 


가볍게 읽을 수 없었다. 산문인지라 무게를 어느 정도 내려놓은 듯했지만 그럼에도 원래의 중량이 워낙에 컸던지, 소지품을 전부 내려놓은 몸뚱이만으로도 무게감이 있다. 뼈 안에 뼈가 꽉 찬 문장. 골다공으로 쉽게 부러질 리 없는 뼈대.

오래오래 읽을 수밖에 없다. 함부로 넘길 수도 없었다. 무심코 넘어간 문장이 아쉽다. 마치 매년 까먹고 없어지는 마일리지처럼 잊고 있다가 알아챘을 때 오는, 그런 얕은 상실감이 있다. 그의 글은 일 년 단위가 아니라 문단 단위. 그런 일이 잦기 때문에 남은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완독을 미루게 된다. 필사를 열심히 하게 된 이유다. 느리게 읽기 위해. 아까워서.


필사는 만년필로,


나는 김훈을 모른다. 하나둘 알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다만, 깊이 더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을 향한 긍정적 감각이 변색될까 두렵기도 하다. 


그의 문장은 밀도가 높다. 그런 단단한 문장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작가란 인간을 깊이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문장이 아닌 사람을 깊이 봄으로써 발생하는 부작용이 두렵다. 모든 문장은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최소한의 구멍이 있다. 부러지지 않으려면 빈 곳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장이 아닌 사람을 향한 판단과 해석은 빈 곳을 억지로 채우려는 시도가 될 수 있으며 이윽고 뼈를 부러뜨린다. 화자는 부러지기 원치 않고, 청자는 부러진 화자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 글은 글로만 보아야 하고 사람은 사람으로만 보아야 한다. 쉽지 않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읽고 듣다 보면 인간을 알게 될 것이다. 화자의 말투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힘을 빼서 읽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다.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향하여 나는 오랫동안 중언부언하였다. 나는 쓸 수 없는 것들을 쓸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헛된 것들을 지껄였다. 간절해서 쓴 것들도 모두 시간에 쓸려서 바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늘 말밖에 있었다. 지극한 말은, 말의 굴레를 벗어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리라 <작가의 말>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인간이므로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음을 뜨겁게 울리는 글을 수도 없이 썼음에도 본인의 말을 지껄였다 표현하는 그의 심정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짧은 시간을 들여 만들어낸 나의 글이 궁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쓸 수 없는 것들, 표현해낼 수 없는 것들을 나만의 도구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나는 앞으로도 참기 어려울 것 같다. 당장은 내면에 존재할 답답함, 무언가의 구속감에게서 해방되기 위한 도구를 다듬고 또 다듬을 뿐이다. 땀을 흘리고 심신이 탄탄해질 방도로 나는 글쓰기를 선택했다. 이것은 쉐도우 복싱과도 같다. 다만 누군가를 때려눕히고 좌절시키기 위한 도구를 다듬는 것이 아닌 제 스스로 피를 뜨겁게 순환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하나둘 알아가는 과정이라고도 말하고 싶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바다의 기별>


사랑할 수 있겠지.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사랑할 수 있겠지. 감각과 감정이 무던한 탓에 살에 직접 맞닿는 것조차 진정으로 닿아있다 생각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가 사랑에 기반한다 해석하고 싶다. 닿아있는 것들도, 닿지 못한 것들도, 닿고자 하는 것들도, 닿기 싫은 것들도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관계라 해석하고 싶다. 지금은 나의 것인 모든 것들을 포함해, 나를 부정으로 끌어내리는 모든 현상들조차도 사랑에 기반한다 믿고 싶다. 미숙한 나는 모든 대상에 손을 뻗어 댈 만한 용기가 아직 부족하다.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이 앞으로 마주할 세계의 진동, 울부짖음에 용기를 얻어 비로소 세계에 온전히 놓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앞으로 마주할 세계를 초연하게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피할 수 없는 세계의 기쁨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을 뿐이다.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에도,  당장의 아픔에 허우적대는 나는, 세계의 파도에 부서진다. 부서진 모습이 온전히 마음에 들 수 있도록 하는 글을, 말에 자주 부딪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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