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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시기 Feb 11. 2021

[힐빌리의 노래] 정말 실패작인가?

가족과 성장의 상관관계

[힐빌리의 노래]는 외신들로부터 일관된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적인 삶을 경험하지 못한 '외국인' 의 입장에서는, 이 지나친 혐오 (과한 표현일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그에 준해 보인다)의 광경이 영화와 창작자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는가 싶다. 원작의 정치적인 컨텍스트를 배제한 것에 대한 반감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트럼프 시대라는 사회 현상을 본디 그른 것으로 받아들일 대부분의 문화계 인사들로서는 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불상사의 해법이 감독의 불순한 의도로 인해 거세된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 그렇게 보면 영화는 과연 사회적 지병을 공들여 묘사해 놓고도 그 원인이나 치료법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그 대신 고약한 난장의 복판에서 기어이 정신을 다잡고 아메리칸 드림에 성공한, 특수한 개인의 사례를 마치 신화 다루듯 취급한다. 결국 개인의 위대함에 박수를 칠 뿐, 그 이면에 위치한 보편적 어둠을 신화적 인물의 서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꼴이 달가울 리 없잖은가.



그러나 [힐빌리의 노래]는 이와 별개의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것도 단순히 미국 러스트 벨트 거주 백인 하층민이라는 한정된 적용 범위를 넘어, 가히 범세계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광대한 보편성 말이다. 바로 ‘가족’ 과 ‘가정’ 이라는 인간 사회의 기본 요소를 통해서, 영화는 관객 저마다의 개인적 경험에 가닿는다. 물론 그 구성과 만듦새는 보는 이에 따라 평범하기 짝이 없다 평할 수 있을 정도로 별다른 특색을 찾기 어렵다. 주인공의 보이스 오버와 어린 시절의 즐거운 추억이었던 잭슨의 풍경을 비추며 시작하는 오프닝도, 예일 로스쿨에 재학 중인 주인공의 예기치 못한 고향 방문을 다루는 2011년의 타임라인과 그의 성장 과정을 비추는 플래시백 타임라인이 사실상 무인과성을 띄며 평행선을 달리는 작법도, 주인공은 결국 자신과 가족의 소망 모두를 이뤄내고야 만다는 시답잖은 해피 엔딩 마저도, 모두 그저 무난한 모양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정치적 논제를 사실상 포기하고 그 무엇보다 보편적인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제법 확고해 보인다.



성장기의 아이-청소년에게 있어 인생의 선택지는 그리 다양하지 못하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주변인, 즉 가족 구성원 저마다의 사정에 따라 이미 정해진 결정을 따르는 것만이 유일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그 결정은 통상적으로 아이 자신의 기대와 상충되는 경우가 많고, 곧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반항심과 무지로 인한 두려움이 포개지며 필연적인 내적 혼란을 동반한다. 안타깝지만 이에 대한 해법은 없다. 가족과의 삶, 나아가 인생이란 과목은 여타 교육이 망라하는 학문과 본질적으로 달라서 미리 공부할 수가 없다. 더욱이 나를 옭아매는 것만 같은 가족의 존재 가치와 필요, 가족 구성원들 개개인의 서로에 대한 의미, 이런 쓸데 없이 보이는 추상적인 감정들을 아이가 무슨 수로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영화는 J. D. 밴스의 어린 시절을 다룬 플래시백들을 통하여 불가해한 사건의 연속에 피동적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아이의 모습을 오롯이 비춘다. 오프닝부터가 그렇다. JD는 잭슨을 가장 먼저 떠나야만 하는 가족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더 머무르고 싶지만, 엄마와 할머니가 떠나자 말하니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돌아온 미들타운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엄마는 가운데 도로를 사이에 두고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산다. JD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에겐 그저 그렇게 된 것이다.


다시 2011년의 타임라인, 중요한 면접으로 바쁜 그에게 엄마의 약물 중독이 재발했다는 연락이 온다. 그 동안 다양한 경험을 거치며 JD는 번듯한 어른이 되었고, 그는 현재 미국 최고 엘리트 사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그는 다 알지 못한다. 왜 자꾸 누나가 엄마를 감싸고 도는지, 엄마는 왜 이리도 이기적인 것처럼만 보이는지, 도대체 나는 면접(을 비롯한 우샤와의 안정적 미래)과 가족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는 여전히 주어진 상황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는 마주한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의 최선을 다하여 답변하고자 한다. 그렇게 그는 훌쩍 성장했고 또 여전히 성장하는 중이다. 이해할 수 없던 시간들에 어렴풋이 각주가 쌓이고, 선택의 자유 따위 없이 줄곧 나의 세계를 몰아쳐왔던 문제들이 비로소 나의 결정을 기다리게 되는, 결코 끝나지 않는 과정. 그렇게 그는, 나아가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가족을 천천히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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