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을 체득한 자에게 허락된 숭고한 희생
사후 의식이 존재한다는 몽상적 가정 하에,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퍽 다양할테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가령 삶에 미련이 없다 헛되이 자신하는 이라 할지라도,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던 지난 날의 작동이 느닷없이 정지하는 순간 찾아올 황망함이란 불가피한 것이다. 픽사는 도리어 삶에 대한 집착이 극에 달한 순간의 인물을 죽음에 이르게 만듦으로써 자기부정과 절망으로 얼룩진 황망의 늪을 향해 관객을 강제로 밀어넣는다.
그러니까 사후 세계를 목전에 둔 조 가드너가 있는 힘껏 역행하여 결국 수직으로 추락하는 것은 여느 오컬트 판타지 영화들의 지옥 방문기와 다를 것이 없다. ‘the great beyond’ 이라고 일컬어지는 공간의 입구는 누가 보아도 천국의 그것과 닮아 있고, 상부의 천국과 하부의 지옥이라는 익숙한 배치 역시 그러하다. 다만 픽사는 창의적으로 소문난 그 명성을 증명하려는 듯 평범한 스토리텔링을 거부하고,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비틀어 일종의 생전 세계라고 칭할 수 있는 ‘the great before (이하 TGB)’를 지옥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대신 그 변두리에 삶과 죽음의 경계와 같이 보이는 구역을 설정한 뒤, 기괴한 영체와 어두운 분위기, 문윈드 일행의 이동수단으로 사용되는 거대 범선 (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옥-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너는 공통된 탈것임이 분명하다) 등의 기호들을 배치하여 기존의 지옥이 갖는 일반적인 이미지들을 계승한다. 같은 맥락에서 TGB는 단테의 신곡에서 묘사된 림보와 닮아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두 곳 모두 유아들의 성소라는 점, 22가 겪었던 멘토들 중 고대의 철학자가 언급되는 것이나 위대한 인물들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공통점 등이 희미한 연결고리를 형성하며 지옥의 상을 덧씌운다. 흥미로운 것은 TGB라는 의미상의 지옥에서 한 번 더 추락하게 되면 그것이 곧 삶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지구행 패치를 획득한 유아들은 거대한 공동으로 자진하여 뛰어들어 생을 향한 추락을 감행한다. 그렇다면 천국-지옥-삶의 계층적 분포를 도식적으로 바라본 [소울]은 삶을 지옥보다 못한 최악의 개념으로 천대하는 극도로 비관적인 영화인걸까.
영화가 그 유명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차용했음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영화 내내 줄기차게 언급되는 ‘불꽃’의 존재와 이에 대해 등장인물들이 필연적으로 범하게 되는 오해와 깨달음이라는 중심 플롯 면에서 그렇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를 공리로 삼는 사상으로, 어떤 개체가 세상에 존재할 때 그 존재의 목적 혹은 이유인 본질보다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인 실존이 선행한다는 철학적 사조이다. 이를 인간의 경우에 대입한다면, 실존주의적 측면에서 개별적 인간은 삶의 이유나 목적 등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미리 결정지어 이 생에 태어나도록 이끄는 신 역시 없다. 인간은 아무런 이유와 목적 없이 그저 현실에 내던져진 존재다. 이는 무한한 자유를 동반하므로 인간 각각의 생활로 빚어진 수많은 일상이야말로 개별적 인간의 존재를 정의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그러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고, 존재 가치를 스스로 탐구해야만 하는 태생적 어려움과 실존을 위협하는 수많은 부조리는 어쩌면 무거운 형벌로 기능한다. 깊은 허무주의에 빠져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이들, 끝없는 쾌락을 좇아 자기파멸적 삶을 영위하는 이들, 물질적 보상과 재화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이들. 그렇게 그들은 잃어버린 영혼이 되어 TGB의 음지를 떠돈다.
그러니까 [소울]은 삶에 특정한 목적이 필요하다고 오해한 인물이 급작스런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겪으며 실존의 의미를 체득하는 영화다. 그리고 아직 광활한 삶의 단면을 겪어보지 못한 다음 세대를 위해 스스로의 실존을 기꺼이 포기하는 영화다. 영화 말미 22를 위한 조의 흔쾌한 희생은 그가 본질을 우선시한 극의 초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황망히 표류하는 모습과 대비되며 숭고함마저 불러 일으킨다. 지옥보다 못한 삶에 단순히 절망하기 보다, 그저 살아갈 뿐인 우리네 인생을 지긋이 회상하고 새롭게 삶을 시작할 다음 세대에게 손을 꼭 잡아주는 풍경. 목적 없는 삶이 두려운 (어른)아이에게 그냥 그렇게 살아가도 괜찮다, 나아가 실존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겪어낼 너를 믿는다 말하는 포근한 선율. 그 순간 영화는 거대한 위안처럼 다가와 마음 깊숙이 위치한 불안을 따스하게 어루만진다. 삶을 지옥보다 못하다 마냥 염세하는 것이 아닌, 이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고유한 가치를 찾음으로써 한 단계 더 성숙한 경지에 이르는 픽사. 기대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누가 감히 그들을 부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