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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시기 Feb 10. 2021

[승리호] 특이점이 온 영화

앞서가는 시대성, 뒤쳐지는 이야기

요즘 이곳 저곳에서 넷플릭스의 [승리호]가 화제다. 극장이라는 공간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은 채 너도나도 앞다투어 영화를 소비하고, 철 지난 내셔널리즘에 대한 반감과 다양성에 대한 의도적 천착이 극에 달한 작금의 세태에 무척이나 걸맞은 영화가 아닌가 싶다. 많은 관객들이 이미 영화의 문제점을 숱하게 지적해주고 있는 만큼 그와 비슷한 감상은 더 나눌 필요가 없어 보이고, 영화의 우수한 기술적 성취를 핑계 삼아 여타 단점들은 뒷전으로 미룬 채 제 자식인 양 비호하는 집단적 경향 역시 충분한 비판을 동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시적 유행에 편승하여, 영화를 보며 근원적인 특이점을 느낀 몇 가지 지점들을 짧게 기술해 보고자 한다. 이미 자본과 관습에 묶여 생기를 잃어버린 한국 영화의 시나리오 작법은 도대체 어떻게 활로를 찾아야 할까.



하나, 인물들의 과거에 기대기를 당연시한다. 인물을 소개하는 시점에는 멋진 척, 재기 발랄한 척, 센 척, 쿨한 척 등 온갖 척이란 척은 다 해 놓고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 느닷없이 시간을 거슬러 돌아간다. 그 경우가 얼마나 빈번했는지 남발되는 플래시백을 보기만 하면 일말의 거부감부터 들기 시작한다. 그들의 다사다난한 사연들은 이후 진행될 특정 사건들에 대한 감정적 트리거 내지 인물들의 행위 근거로 기능함으로써 명백한 목적성을 가진다. 물론 작법의 효율성 측면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이해를 못 할 건 아니지만, 플롯의 청사진이 너무 투명하게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마구 남용되어 이제는 언급조차 하기 싫은 '신파그 단어' 의 기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온다.


둘, 원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시키는 서비스 숏을 지속적으로 배치한다. 영화는 무릇 보는 이를 속이는 매체다. 여러 예외적인 경우는 차치하고, 영화 매체의 근본은 관객으로 하여금 눈앞에 펼쳐진 픽션을 능청스레 믿게 만드는 눈속임이란 말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좀 다르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후까시를 멋스럽게 포장하는 카메라 워크 (지금 여러분에게 떠오른 그 장면 말하는 거 맞다—그게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지만)들이 등장하는 순간, 사각의 프레임이 스스로의 존재감을 공고히 하고, 카메라 뒤에 위치한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뿌듯한 표정들이 보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간접적인 소격효과인가. 무덤 속의 브레히트가 벌떡 일어나 팬티 벗고 소리 지를 일이다.


셋, 영화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서라면 다소 급진적인 진행도 서슴치 않는다. 사실 본 항목의 경우 앞선 두 요인과 궤를 달리하는, 단순한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영화가 표방하는 가족주의적 세계관에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것도 혈연에서 비롯하는 가족의 고전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동일한 처지의 인물들이 서로 연대하는 현대적 대체 가족을 다뤘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하고 싶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꽃님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강현우를 가차 없이 제거하는 방식이 썩 달갑지는 않다. 어쩌면 앞선 두 문제에서 파생된 플롯의 빈약함이 그 원인일 수 있겠다만, 아무래도 잦은 변덕으로 인해 영화가 마치 조울증에 걸린 듯한 인상은 어쩔 수가 없다.


그 외에도 인물의 입을 직접 빌려 명언들을 강박적으로 내뱉는... 이만 여기까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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