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시기 Feb 26. 2021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지나간 세대의 명확한 공포

디지털을 두려워한 아날로그의 비애

이와이 슌지의 [라스트 레터]가 국내에 막 개봉했다. 이미 일본에서는 개봉한 지 1년이 지난 영화이지만, [러브레터]를 필두로 [4월 이야기], [하나와 앨리스] 등 국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지지를 획득한, 일본인으로서는 굉장히 특수한 규모를 동반한 감독의 신작이기에 여전히 왠지 모를 기대감이 잔존한다. 그러나 이 글은 [라스트 레터]에 대한 것이 아니다. 슌지의 복귀 소식을 듣고 그 동안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감상한 그의 괴작,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주인공이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본디 이야기가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서사는 불친절하고 인물 간의 관계는 성기다. 캐릭터의 감정선은 변덕스럽고 쉽게 따라가기도 어렵다. 인터넷 게시판에 실시간으로 작성되듯 타이핑 되는 문자들은 빈번히 틈입하여 가까스로 연결될까 힘겹게 교감하던 이미지들을 끊어낸다. 이로써 영화의 윤리는 결국 분절과 파편화에 기반하는 조각남의 현현이다. 단순히 편집으로 잘려진 영화 속 이미지를 넘어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영화 속 인물 중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관객마저도 온전한 상실 혹은 절망, 행복과 희망 등의 구구절절한 감정 따윈 허락되지 않는다. 암담함, 무력감과 같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일종의 환경적 정서가 물론 존재하나, 이미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한 사건들, 난데없이 닥쳐오는 죽음의 그림자, 친구였던 이의 급변한 태도, 무릇 사춘기 아이들에게서 야기될 법한 자기 존재에 대한 의문 등과 같이 기본적으로 알 수 없음, 즉 불가해함에서 비롯하는 문제들은 애당초 해소가 불가능하다. 이에 대응하고자 미친 듯이 악쓰고 폭력을 휘둘러 봤자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이들은 가상의 음악을 피난처 삼아 그 속으로 도피한다. 릴리 슈슈, 그리고 드뷔시. 그러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오직 그들의 음악으로 채워진 영화적 시공간 속을 기약 없이 부유하는 것만이 창작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일이다. 어차피 이해할 수도 없는 질문들에 절망한 채로 죽은 듯 침잠하기보다는, 마치 나를 위로하는 것처럼 들리는 음악에 기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한층 속 편하니까 말이다. 다수의 어린 시절과 연결 짓기에 매우 보편적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고작 헛돌기에 불과한 실속 없는 정서이므로, 누군가는 열렬히 지지하고 다른 누군가는 허세스럽다며 거부하는 이분법적 결과가 발생하기 쉽다. 살짝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에테르'로 통칭되는 현실과 유리된 우주 개념을 나로서는 다소 보기가 힘들었다. 여하튼 간에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보는 이의 개인적 감상에 의존하니 그렇다 치고, 이번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다시 읽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영화의 제작 배경으로 다시금 돌아가야만 한다.



슌지는 본 영화를 제작하기 전 인터넷을 활용한 독자 참여적 소설을 기획했다. 가상의 가수로 지정된 릴리 슈슈를 기본 캐릭터로 하여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사연과 사건들을 새로이 제작한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한 뒤, 네티즌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서사의 살을 붙여 나갔다. 물론 게시글과 댓글들의 기본 뼈대는 철저히 기획된 것이었으므로 완전한 즉흥의 산물은 아니었다. 핵심은 이것이 인터넷의 확장된 접근성에 기반한 디지털 매체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슌지는 이렇게 완성된 이야기를 소설로 출판한 뒤 다시 영화화했다.


디지털. 영화가 제작된 2001년은 아날로그의 시대가 지고 디지털이 도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다. 인터넷을 필두로 다양한 디지털 매체들은 기존의 것들을 신속하게 잠식하여 하나 하나 대체해가고 있었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디지털 캠코더의 보급은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를 열어 젖혔고, 수많은 비디오들은 임의의 시간과 장소에서 임의의 누군가에 의하여 저마다의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정성일의 표현을 잠깐 빌리자면, 영화는 "기존에 갖고 있던 예술적 성격이 아닌 미디어적 성격을 훨씬 더 거대한 영향력으로 품게 된 것" 이다. ('정은임의 FM영화음악 - 영화의 지난 8년' 중, 2004) 이러한 측면에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소위 저물어 가는 아날로그 시대의 현대인들이 겪었던 디지털에 대한 공포를 영상화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화의 곳곳에 자리한 디지털적 요소들은 이러한 감상을 문제 없이 뒷받침한다.


가장 먼저 릴리 슈슈의 존재가 그렇다. 앞서 영화의 제작기를 기술한 데서 보듯, 릴리 슈슈는 허구의 존재다. 가상의 존재가 인터넷의 익명성과 접근성에 힘입어 존재 이유를 획득하고, 그 존재는 픽션의 영화 속에서 인물들을 현혹한다. 영화의 초반, 릴리 슈슈를 사회의 악처럼 배척하는 언론을 언급한 대목은 디지털을 향해 컬트적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덧씌우는 작업과 다름없다. 이에 더하여 게시판 스레드의 일환으로 이미지들을 분절하는 디지털 문자 사슬은 외적으로 너무도 확고하게 드러나는 디지털의 폐해다. 디지털의 가위들은 아날로그적 이미지들을 사정 없이 잘라내고, 그 결과 감정은 파편화되어 더 이상 온전하게 느껴지지 못한다. 유일하게 디지털 문자가 등장하지 않는 오키나와 여행 시퀀스. 이 푸티지들은 오로지 배우들의 손에 들린 디지털 캠코더로 촬영되었다. 불량한 화질과 무질서한 구도, 마음 내키는 대로 찍혀진 오키나와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오키나와가 이리도 못나게 나오는 영화는 처음이다). 죽음의 그림자로 둘러쳐진 일련의 장면들은 사실상 만악의 근원으로 기능한다. 유이치 (이치하라 하야토 분)와 그렇게도 친하게 지냈던 호시노 (오시나리 슈고 분)는 이 여행을 기점으로 악마가 된다. 그와 함께 츠다 (아오이 유우 분)와 쿠노 (이토 아유미)의 비극 역시 시작된다. 그야말로 디지털의 마수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불가피한 비극인 것이다.



음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릴리 슈슈와 그녀의 음악이 디지털을 대변한다면, 반대쪽에 위치한 아날로그의 거두는 바로 드뷔시다. 영화의 주요 인물 4인방 (호시노, 유이치, 츠다, 쿠노) 중 쿠노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은 릴리 슈슈의 음악을 듣는다. 유일하게 쿠노만이 릴리 슈슈를 직접적으로 듣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며, 도리어 그녀는 음악실에서 드뷔시를 연주한다. 쿠노를 연모했던 유이치 역시 그녀가 연주했던 드뷔시를 듣는다. 결국 영화에서 릴리 슈슈만을 들었던 호시노와 츠다는 죽고, 드뷔시만을 좇았거나 그런 그녀를 동경했던 쿠노와 유이치는 산다. 릴리 슈슈 본인마저 드뷔시를 경외했다는 묘사는 어쩌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모 자식간의 그것과 유사한 애증 관계를 반영한 것일까. 여하간 영화는 살아남은 두 인물이 각기 드뷔시를 연주하고 경청하는 모습으로 마무리한다. 여전히 감독은 아날로그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은 셈이다.


상기의 시선은 가히 도식적인 해체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나, 영화가 제작되었던 시기 디지털의 도래가 한 시대의 교체를 선언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디지털의 도착을 뒤로 하고 포스트 디지털을 넘보는 작금의 세대에게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더 이상 지난 날의 몽상에 불과한가. 그럼 지금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정확히 무어란 말인가. 한편으로는 사회-시대상의 급진적인 변화가 곧 명확한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이전의 세대들이 부럽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현재의 우주를 무기력하게 방황하고 있는 걸까.

작가의 이전글 [힐빌리의 노래] 정말 실패작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