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v Jan 12. 2021

익숙하지 않아서 얻을 수 있던 것들.

사라진 시간(2019)

‘사라진 시간’을 둘러싼 상반된 평가

영화 ‘사라진 시간’은 정진영 배우의 감독 데뷔작으로 걱정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작품이다. 이전의 많은 배우들이 감독 데뷔 과정에서 아쉬움을 남겼기에, 세간의 관심이 걱정과 기대로 양분되었던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영화의 뚜껑을 열어보았을 때의 반응 또한 극과 극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전문 영화 평론인들의 평점과 대중들의 평점은 상반된 양상을 보였다.

네이버 포털사이트를 기준으로, 해당 영화에 대한 관람객들의 평가는 박하다 못해 잔인하다. ‘관람한 시간이 사라졌다’ ‘영화를 본 시간이 아까웠다.’ ‘무슨 내용인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등등 영화에 대한 악평들이 줄을 이었고, 6.44점이라는 초라한 대중 평점에서 알 수 있듯이 대중들은 이 영화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영화는 대중과 매우 밀접한 예술분야이고 대중에게 외면받은 작품은 그 자체로 의미가 퇴색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영화를 본 대중들의 평가를 존중하고 이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본인은 조금 다른 시각에서 해당 영화를 바라보았고, 이 글을 통해 대중들의 평가가 유일한 정답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싶다.


장르 탈피
영화'사라진 시간' 스틸컷

 영화‘사라진 시간’은 기존의 미스터리 작품들의 전형적인 서사 틀을 따르지 않는다. 미스터리에 대한 정답을 알려주지도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미스터리 한 상황만을 던져놓고 이 속에서 방황하는 박형구(조진웅)를 그린다. 영화는 장르적 관습을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스터리물 내 존재하는 개별 장르들을 융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 영화는 마을 화재 사건 속의 미스터리를 다루는 듯하다가 박형구의 신분이 바뀌는 것을 기점으로 판타지적 미스터리를 다루게 된다. 이처럼 영화‘사라진 시간’은 전형적인 틀에 익숙해져 버린 관객들을 비웃듯 영화의 장르를 자유자재로 파괴한다. 볼품없다는 대중들의 평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영화와 관련된 서적을 읽던 중,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특정 장르 영화를 향유하기 위해 관객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은 해당 장르에 대한 익숙함이다’. 전형적인 익숙함과 편안함을 배반한 이 영화는 대중들 입장에서 근본 없는 영화로 보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본인은 이러한 대중들의 취향을 장르의 익숙함에 중독되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단순히 익숙한 장르 틀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영화가 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기생충이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다고 평가받은 것처럼, 영화‘사라진 시간’도 오히려 미스터리 물의 경계를 허물었다고 평가받아야 되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본인은 이 영화가 ‘의미 없다’ ‘재미없다’와 같은 평이한 말들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라진 시간’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틀을 제시한 영화이자 새로운 틀 안에서 묘사될 수 있는 새로운 느낌에 관한 영화이다. 참신한 영화향유 방식을 우리에게 선사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평가 기준이 필요할 때이다. 편안함에 중독된 우리 스스로를 내려놓고 영화를 다시 감상해보자.           

장르 탈피로 느껴진 신선함
영화'사라진 시간' 스틸컷

 영화에서의 '사라진 시간'은 단순히 시간적 과거가 사라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화 속 특정 시점을 기점으로 주인공(박형구)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영화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을 관객들에게 던지는 것이다. 정체성에 관해 질문을 던졌던 영화들은 물론 수 없이 많았다. 그렇기에 영화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제 같은 질문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던지느냐에 있다. 영화'사라진 시간'은 정형화된 장르 틀을 벗어던지며 같은 질문을 다른 차원에서 던졌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르는 시퀀스, 혼자 술을 밤새도록 마시는 롱테이크 숏 등등. 영화 속 프레임들은 '나'라는 정체성 속에서 헤매는 박형구를 보여준다. 영원히 찾을 수 없음에도 무언가를 쫓기만 하는 박형구의 모습은 비통하고 비루해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는 끝까지 이 미스터리 적 상황에 대한 답을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프레임 속 박형구의 감정들을 더욱 처절하게 묘사한다. 동일 감정선, 동일 메시지를 다루었던 다른 영화들과 분명 차별화된다. 관객들 또한 줄곧 주인공과 동일한 인지 범위를 유지하기에, 박형구라는 캐릭터에 더욱 집중하고 공감하게 된다. 장르적 탈피를 통해 영화는 같은 메시지를 새롭게 보이도록 만드는 데 성공하였고 관객들을 감정선 안으로 더욱 쉽게 들여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장르 탈피의 효과는 단순히 감정선들이 특별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영화'사라진 시간'의 장르적 탈피는 개인적 체험 차원에서도 특별하다. 모두가 같은 결말을 기대하는 틀 속에서는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틀을 부숴놓는다면 정 반대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관객들은 영화'사라진 시간'을 볼 때만큼은 미스터리 장르의 당연한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해결 시퀀스를 손꼽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일종의 감상적 여유를 부여받은 덕에 우리는 각자의 감정들에 충실할 수 있었다.

영화의 감정선들을 더 살펴보자. 수학 시간에 체육이나 하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던 박형구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국어책을 피라고 한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집에서 초등학교 교과서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박형구가 씁쓸하면서도 씩씩해 보인다. 격화되기만 했던 자기부정이 순응과 현실 자각으로 승화된 순간들이다. 온천에서 만난 뜨개질 강사 초희와의 만남에서도 박형구는 이제 자신이 기억 못 하는 과거에 대해 놀라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인다. 상실감에 아파하면서도 이를 사진 속에 묻어두는 진규(해균의 아들)처럼 박형구는 초연해졌고 그 안에서 성장한다. 언급한 플롯 라인을 보며 누군가는 박형구가 현실에 순응하는 장면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박형구의 현실 순응 태도에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현실 순응을 통해 박형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수도 있겠다. 영화가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어준 덕에 영화를 관람하는 개인들은 각자의 감정을 생성할 수 있었고 자신이 생성한 감정들을 음미할 수 있었다. 영화 '사라진 시간'이 기존의 장르 틀을 따랐다면 불가능했을 개인적 체험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장르 탈피로 가능해진 다방향적 해석
영화'사라진 시간' 스틸컷

감독은 장르적 탈피를 통해 영화의 플롯이 다양한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하였다. 본 단락에서는 필자가 생각하기에 많은 이들이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해석 방향들을 소개하고, 이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나름대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영화에 대한 특정 해석 방향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두 가지 방향으로 영화를 이해하였을 듯싶다. 첫 번째는 영화가 진행되는 시간 순대로 씬들을 받아들이는 것. 이를 나는 ‘순 방향적 이해’라 부르겠다. 두 번째는 영화의 시간들을 파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를 역 방향적 이해라 부르겠다.

순방향 읽기는 영화의 흐름대로 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읽기 방향이다. 순방향으로 읽게 되면, 영화는 단순히 판타지 적 계기로 인해 과거를 잃고 새로운 삶 앞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다. 반대로 역방향으로 읽게 되면, 영화는 정신이상 증세가 있는 주인공이 자신만의 허상을 만들어냈고 그 허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 방향으로 읽었을 때 그 시간 순이 파편적이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허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형사 시절 박형구의 과거는 분명 자신의 경험과 기억의 파편들이 재조합된 형상일 것이다. 영화 속 정신과 의사가 “꿈은 기억 속에 있는 불편한 파편의 쓰레기 소각”이라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형사 시절의 허상을 구성하는 기억의 파편들이 형사 시절 이후, 즉, 선생님이 된 시간 속에서 습득된 파편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의 생각이 구성된다는 기본적인 원리를 거스른다. 다시 말해 형사 시절의 과거가 현재 혹은 미래(선생님 신분의 시간)와 연결되어있고 서로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영화의 플롯이 재해석된다는 것이다. 다중우주가 떠오르기도 하고 종교적 섭리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역 방향적 읽기 틀을 가지고 영화를 보면, 영화의 시간들은 순서대로 가 아닌 뒤죽박죽으로 흩어져있다. 이를 나는 파편적이라 표현한 것이다.

 각자의 방향으로 영화를 읽었을 때, 특정 씬들이 갖는 의미성 또한 가히 달라진다. 단적으로 부인(미경)을 만나는 동창회 시퀀스나 온천에서 부부(수혁, 이영)를 만나는 시퀀스를 가지고 이야기해보자. 순 방향적 이해 틀을 가지고 보면, 박형구는 온천에서 만난 그 부부가 누구인지 그리고 미경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모른척하거나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박형구의 모습은 자신이 순응한 현실에 충실하고자 하는 의도들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역 방향으로 이해해 보면, 해당 씬들은 현재의 시간들을 의미하는 동시에 과거의 기억들을 이루는 파편들이다. 즉 앞서 언급한 파편적 시간 구성에 대한 증거들로 해당 씬들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해당 씬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박형구의 정체성들이 단선적 시간선에 구애받지 않으며 서로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위의 해석 방향들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이들이 감독의 의도와 합치되는지는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를 읽는 방향에 따라 모든 것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필자가 제시한 순방향, 역방향이라는 두 가지 읽기 방향 외에도 개인에 따라 새로운 읽기 방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만약 영화가 전형적인 미스터리 장르 틀을 따라갔다면, 관객들은 이처럼 다양한 영화 읽기 체험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가능성들을 의도적으로 조성하고 관객들에게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준 이 영화가 참신하고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가.  


 대중들의 평가를 거스르는 리뷰를 작성한 것은 이 영화에 대한 개인적 애착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보통 영화를 보고 이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본인은 해당 영화를 여러 번 관람하곤 한다. 그런데 영화'사라진 시간'의 경우 다회 관람을 하지 않았는데,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느낌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영화 속 초희가 불상을 보수한다는 공지를 접했을 때 들었던 감정과 유사하려나.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을 간직하고 싶은 영화는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러하였기에 더욱 열성적으로 영화의 가치를 변호했던 것 같다.

본인은 이 글을 통해 사람들의 영화를 보는 관점이 다양해지기를 바란다. 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은 영화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비전문적이라 할지라도, 이 글이 쓰이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많은 이들이 본인의 리뷰를 즐겁게 읽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듯싶다.



■ 영화'사라진 시간' 속 철제 문과 자물쇠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 직업을 포함한 주인공의 모든 것이 특징 시점을 기준으로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바뀌지 않은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박형구의 정체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