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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 Feb 11. 2021

사춘기 학생들의 여름 나기

보희와 녹양(2018)

“참나 할머니 죽은 게 뭔 대수라고”

같은 반 남자아이의 말에 보희는 주먹을 불끈 쥡니다.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간 녹양이를 생각하면 녀석의 혼잣말은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아마 보희와 같은 마음으로 분노를 경험하셨을 것 같습니다.

보희에게 제발 참지 말라고, 피하지 마라고 마음속으로 응원한 이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러했으니까요.

물론 양아치 친구와 전쟁을 선포하라는 우리의 바람은 비실비실한 평화주의자 보희에게 무리한 요구였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기대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요. 바로 그때 보희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납니다.

그대로 저벅저벅 걸어가 망언을 내뱉은 남자아이 곁으로 다가갑니다.

보희가 한마디 던집니다. “너 뭐라고 그랬냐”.

마음을 졸이며 보희를 지켜보던 우리도 진심 어린 응원을 하게 됩니다.

‘몇 대 맞더라도 시원하게 한 대 쳐라 보희야!!! 제발!!’


 잔잔한 영화 한 편을 보자는 가벼운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보희와 녹양이에게 마음을 완전히 뺏겨버립니다. 누군가는 그들의 순수한 마음에, 누군가는 그들의 당찬 성장일기에 매료되었던 것이겠지요.      


전반부 줄거리


영화 <보희와 녹양>에서는 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보희라는 이름의 남자아이와 녹양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입니다. 보희는 미용실을 운영하는 어머니를 두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보희에게 보희의 아버지가 오래전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말씀해주십니다. 녹양이는 반대로 어머니가 안 계십니다. 대신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각자의 아픔을 간직한 채 두 아이는 몇 가지 계기를 통해 친해집니다. 그들의 우정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되어 중학교 1학년이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아이는 서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사이가 각별합니다.

어느 날 녹양이가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선언합니다. 덧붙여 보희도 이 다큐에 출연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요. 보희는 녹양이의 제안에 싫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녹양이의 의지는 보희의 거절 의사보다 강했고 둘은 같이 다큐를 제작하자는 합의 아닌 합의를 하게 됩니다. 이후 둘은 길을 걷다 보희 어머니가 남자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충격을 받은 보희는 엄마에게 만약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긴다면 집을 나갈 거라고 녹양이에게 말을 합니다. 가출 행선지를 묻는 녹양이의 질문에 보희는 어렸을 적 잠깐 동안 함께 지냈던 이복 누나를 떠올리게 됩니다. 누나의 번호를 알아낸 보희는 녹양이의 재치 덕분에 누나의 주소를 확인하고 그 길로 누나의 집을 찾아 나섭니다. 누나의 집을 찾아간 보희는 누나와 누나의 동거인, 성욱이 형, 을 만나게 됩니다. 예전에 무섭기만 했던 누나는 어느덧 스튜어디스가 되어 있었고 싱그러운 미소로 보희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물론 누나의 동거인 성욱이 형은 문신이 있는 무서운 형으로밖에 안보였지만요. 누나는 당장 비행기를 타야 했고 며칠 동안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성욱에게 보희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떠납니다.


집으로 돌아온 보희는 엄마와 밥을 먹으며 대화를 합니다. 대화를 하던 중 보희는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빠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피하는 엄마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지금껏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렇게 아빠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보희는 또다시 엄마와 엄마의 애인을 만나게 됩니다. 녹양이에게 했던 약속처럼 보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갑니다. 갈 곳이 없는 보희는 누나 집으로 다시 향합니다. 누나는 아직 출장을 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고 성욱이 형은 밤에 일하는 탓에 나갈 채비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보희는 누나 집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청소나 하라는 성욱의 말을 듣고 집을 청소하던 중 보희는 편지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오래된 듯한 편지였지만 보희는 이것이 아빠에게서 온 편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희는 녹양이와 함께 그 집 주소로 찾아가게 됩니다. 녹양이는 자신의 선언대로 보희와 함께 다니며 보희의 모습을 카메라로 계속 찍습니다.

 

보희는 과연 그 주소에서 아빠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녹양이는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완성시킬 수 있을까요?   

    





영화 <보희와 녹양> 스틸컷
전형성을 피한 연출. 다양성을 품은 하나의 풍경화

영화 <보희와 녹양>은 안주영 감독의 첫 번째 장편 데뷔작입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성 역할 측면에서 다소 전도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고착화된 전형성을 비틀고 싶다던 안주영 감독의 의도가 드러나는 연출입니다. 동일 의도에서, 보희 아빠의 비밀 또한 우리의 통념을 완전히 뒤엎습니다. 하지만 안주영 감독의 의도들은 사회 비판적 성향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따뜻한 여름 냄새처럼 유려하게 흘러가는 영화의 플롯은 우리에게 ‘불편’이라는 감정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급진적인 메시지들이 판을 치는 영화계에서 따뜻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들은 분명 특별한 힘을 습니다. 안주영 감독은 ‘그건 틀렸고 이렇게 고쳐야 해’라는 강압적인 서사 화법 대신 사려 깊은 서사 화법을 채택함으로써 우리의 깊은 공감을 유도했고 사회에 새로운 울림을 선사해주었습니다.


 이외에도 영화 <보희와 녹양>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어른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다루기도 하고 누구나 경험해본 어린 시절의 서툰 사랑을 다루기도 합니다. 영화 <보희와 녹양>은 인생의 다양한 면들을 적절히 섞어내어 하나의 풍경화를 그려낸 것이지요. 물론 무엇에 중점을 두었든, 영화가 주는 따스한 감정의 냄새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 <보희와 녹양>을 전형적인 다양성영화, 성장영화, 혹은 로드무비로 소개하기엔 무언가 아쉽습니다. 하나의 틀에 갇힌 관람법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다양한 빛들을 가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영화 <보희와 녹양>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이 영화를 군말 없이 구매하고 재생버튼을 누를 용기뿐입니다.

     





영화 <보희와 녹양> 스틸컷
여름 냄새가 가득한 시네마토그래피

카메라 움직임은 영화를 평가하는 데 있어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레버넌트>, <칠드런 오브 맨>의 촬영감독 엠메누엘 루베즈키가 대중들에게 새로이 주목받았던 일례도 이를 증명합니다. 영화 <보희와 녹양>의 촬영감독은 이성용 감독입니다. 이성용 감독 역시 <보희와 녹양>으로 데뷔한 촬영감독입니다. <벌새>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강국현 감독의 부사수로 활동해왔고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영화 속 이성용 감독의 카메라 시선은 천진난만한 두 아이를 닮아 굉장히 발랄합니다. 줌 기능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기도 하고, 트래킹 숏을 적재적소에 넣기도 하며, 제로 컷을 플래시백을 위한 장치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절제된 시네마토그래피가 대세인 현재, 이성용 감독의 시네마토그래피는 익숙하면서도 새롭습니다.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이성용 촬영감독은 "나무가 많고 녹색이 지배적인 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여름 내음 가득한 영화의 감정선이 이성용 감독의 숨겨진 의도 덕분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풋풋한 느낌의 플롯과 따사로운 여름을 공존시키는 이성용 감독의 촬영 방식이 안주영 감독의 작가관을 일관성 있게 구현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더불어 인터뷰에서 이성용 감독은 ‘화면 구성이 즐거움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콘티를 짰다’고 이야기합니다. 카메라 구도가 일차적으로 재미를 주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의 발랄한 카메라 움직임이 단순히 캐릭터 성격만을 반영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답변입니다. 과도한 시네마토그래피는 보는 이를 피곤하게 만들 법도 하지만, 이성용 감독은 그 적정선을 훌륭하게 지킵니다. 데뷔작임에도 그의 촬영 철학은 영화 속의 햇살처럼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의 다음 작품이 또 어떤 재미를 만들어낼지 기대가 됩니다.

     




영화 <보희와 녹양> 스틸컷
과도한 낙관주의?

영화 <보희와 녹양>은 하나같이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가득합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모든 캐릭터들이 각자의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듯, 영화 <보희와 녹양>의 캐릭터들 또한 하나하나 각자의 임팩트가 있습니다. 다른 의미에서의 임팩트지만요. 영화 속 캐릭터들은 방식이 각기 다르지만 모두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안주영 감독은 영화가 제작된 후에서야 모든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미 아픔을 갖고 있는 두 아이에게 더 이상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전형적인 악인이 등장하지 않기에 영화의 긴박감이나 흥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또 영화가 과도하게 낙관주의적 프레임을 고수했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영화 <보희와 녹양>을 보며 관객들은 누군가의 악한 행동을 벌벌 떨며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나마 가장 악인 시퀀스에 가까웠던 양아치 친구와의 갈등 씬들마저도 순한 방향 다뤄졌으니 말이지요. 어찌 되었든 간에 영화 자체가 동화 속 이야기처럼 밝기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낙관적인 인물 구성과 플롯이 이 영화의 가치를 떨어트린다는 의견에는 도무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영화의 내적 요인들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예술이 아닙니다. 영화는 어떤 예술 채널보다도 대중들의 정서와 시대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합니다. 영화 <이지라이더>가 아직까지 명작으로 남은 이유도 60년대 70년대의 미국 사회 분위기를 적절히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대중들의 정서와 영화 사이에는 필수 불가결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면, 영화 <보희와 녹양>이 택한 낙관적 형식들은 분명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021년의 대한민국은 혐오의 시대라 불릴 정도로 삭막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는 비난과 불신으로 얼룩진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혐오가 새로운 평범함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는 분명 사회 발전 과정에 있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요 근래 유독 절망적인 뉴스들을 더 많이 접하는 대중들에게 무거운 현실을 바라보는 객관적 인식 능력은 이미 충분해 보입니다. 오히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태도가 과한 나머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가치들이 사람들에게서 잊혀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쓸모없는 것들'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말이지요. <보희와 녹양>의 인물 구성과 플롯은 잊고 있던 가치들을 상기시켜준 경종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구성을 통해 누군가는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아닐까요?  영화 <보희와 녹양>은 시대가 요구하는 형식과 메시지를 정확하게 담아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인즉슨 존재 자체로 의미 있는 영화라는 것이지요.







(이어지는 단락은 약간의 스포가 있습니다)

영화 <보희와 녹양> 스틸컷
반복되는 입수 숏. 영화를 아우르는 하나의 메시지

영화 <보희와 녹양>은 시작하자마자 강을 향해 겁도 없이 다가가는 한 남자아이를 보여줍니다. 순식간에 강으로 몸을 숨긴 아이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해당 장면은 영화 후반부에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영화에서 의미 있게 반복되는 요소를 모티프(motif)라고 합니다. 초반부와 후반부에 동일하게 반복된 입수 숏은 영화 <보희와 녹양>의 중요한 모티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제작자들은 의미 없는 반복 요소를 영화에 넣지 않습니다. 영화 한 편을 찍게 되면 제작진은 보통 러닝 타임의 10배가 넘는 촬영 본을 확보하게 되는데, 그 긴 촬영 본에서 반드시 필요한 장면들만 솎아내고 또 솎아내어 관객들 앞에 내놓습니다. 즉 우리가 관람하는 영화 작품은 100번의 심사숙고 끝에 엄선된 장면들이라는 것입니다. 제작진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의미 없는 반복 요소들을 아까운 러닝 타임에 쪼개어 넣진 않았겠지요.(물론 이를 일부로 의도하는 영화감독들도 존재하긴 합니다.) 해당 관점에서 영화의 모티프 씬들을 바라보면 굉장히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초반부 입수 씬을 뒤이어 바로 울고 있는 보희의 클로즈업이 나옵니다. 해당 입수 씬이 보희가 보는 영화의 한 장면임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이후에 영화가 끝이 나고 영화관을 나서면서 보희와 녹양이가 대화를 합니다.


“그래서 영화 끝에 어떻게 되는데”

“어디까지 봤는데?”

“주인공 남자애가 갑자기 죽잖아(입수 씬)”

“그게 시작인데...”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이 대화. 근데 사실 이 대화가 반복되는 입수 씬들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이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임을 여러분은 알아채셨나요?

이에 대한 근거는 영화 속 이중 프레임 요소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철저한 틀을 지키고 있지는 않지만 영화 <보희와 녹양>은 액자식 구성과 이중 프레임 요소들을 적극 활용합니다. 영화상에 녹양이가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이 그러하고 영화를 관람하는 씬이 두 번이나 등장하는 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첫 번째 영화관 씬에서 감독은 이중 프레임에 대한 언질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첫 번째 영화관 씬에서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보희와 녹양'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보희와 녹양이 관람한 영화가 영화 <보희와 녹양>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두 아이가 영화관을 나서며 나눈 대화가 영화 <보희와 녹양>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두 아이의 초반부 대화가 영화 전체의 메시지와 등치 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이제  아이의 대화가 반복되는 입수 씬들을 어떻게 연결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메시지로 영화를 관통하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후반부에 보희는 그토록 찾던 아빠를 만나게 됩니다. 아빠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던 차 보희는 아빠의 비밀을 목격합니다. 바로 다음 숏에서 초반 입수 숏과 동일하게 강으로 걸어 들어가는 보희가 나옵니다. 이후에 자신이 만든 다큐 영화를 보는 녹양, 가게를 정리하는 성욱, 그리고 보희를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들이 차례대로 이어지고 보희는 이제껏 지니고 있던 아빠에 대한 상처들을 훌훌 털어버리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보희의 입수라고만 생각했던 씬의 반전이 나옵니다.

강에서 수영을 하는 보희가 등장한 것이지요.

보희의 입수는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자살로 비유되는 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보희는 평생 동안 간직해왔던 아픔을 마주하는 시간 속에서 성장해왔습니다.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녹양이와의 사랑, 엄마와의 사랑, 그리고 성욱이 형과의 우정을 얻었습니다. 새롭게 얻은 동력들을 바탕으로 보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는 보희의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마음들을 수영을 하는 보희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지요. 우리는 수영을 하는 보희의 모습을 통해 보희가 이제는 더 이상 아파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갈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생일파티 시퀀스에서 씩씩하게 팔을 걷어 부치고 형과 장난치는 보희의 행동들은 이러한 보희의 내적 성장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반부 대화 씬으로 돌아가 봅시다. “남자 주인공이 갑자기 죽잖아”라고 말한 녹양이의 말에 보희는 “그게 시작인데..”라고 대답합니다. 초반부에 있었던 두 아이의 대화는 '아픔의 시간들이 아이들에겐 새로운 출발점이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감독은 영화의 메시지를 초반부 두 아이의 대화에서부터 미리 예고한 것이지요.


 정리하자면, 영화는 반복되는 입수 숏을 통해 보희의 성장과 심경변화를 효과적으로 표현하였고, 초반부에 이중 프레임 요소와 관련 대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영화의 해석 방향에 대한 길잡이를 관객들에게 미리 귀띔해주었습니다.

다회 관람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디테일입니다.







영화 <보희와 녹양> 스틸컷
독립영화에 대한 생각

극장에서 독립영화를 접하기란 하늘에 별따기 수준이 되어버렸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대형 극장들도 문을 닫거나 무기한 휴업을 결정하고 있는데, 소규모 독립영화 극장들은 오죽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다양한 OTT채널들이 활발해짐에 따라 집에서도 쉽게 독립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립영화는 영화산업을 받치고 있는 주요 기둥입니다. 독립영화에서 실현된 혁신적인 시도들은 새로운 주류문화가 되기도 하고 새로운 문화 파워로 승화되기도 합니다. 독립영화시장이 무너지면 대중 영화시장 또한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얘기하면 대중 영화시장도 잇따라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막연하게 독립영화들을 사랑해달라고 무작정 사람들에게 빌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요. 영화를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제 입장에서도 과하게 난해한 독립영화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희와 녹양>처럼 대중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차별점들을 지니고 있으면서 즐기기에도 부담이 없는 독립영화들이 많습니다. 이 영화들은 대중들에게 주목받아 마땅하지만 독립영화라는 카테고리적 한계에 부딪혀 쉽게 묻히곤 합니다. 다양한 채널들과 시장들이 확대되면서 독립영화시장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독립영화들의 가치가 존중받는 세상, 그리고 하나의 문화요소로서 독립영화가 제 역할을 다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영화계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지속적인 연대와 관심이 필요하겠지요.




 오랜만에 따뜻한 영화를 본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독립영화를 사랑하시나요? 그리고 그 독립영화에 대한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아직 독립영화의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셨다면 이번 기회에 <보희와 녹양>이라는 영화를 통해 그 깊은 바다에 한번 빠져보시는 건 어떨까요?



사춘기 학생들의 여름 나기 <보희와 녹양> 리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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