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한 꺼풀 벗기면 다 똑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한 줌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 겉치레 수준에 불과하며,
사회적 연기의 요구를 벗어던지는 순간,
이른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순식간에 격하된다는 냉소를 담고 있습니다.
욕구와 본능에 충실한, 그런 짐승과 같은 존재로요.
이는 어떤 의미에선 맞는 말입니다.
우리의 뇌에서 소위 '인간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고차원적 활동들,
계획을 세우거나, 욕구를 참거나, 약속을 지키거나, 상상 및 추론을 수행하는 부위는
이른바 피질 영역이라고 부르는 곳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뇌의 겉껍질을 칼로 얇게 도려낸다면,
즉 한 꺼풀 벗기게 된다면,
우리는 훨씬 짐승에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피질하 영역은 주로 반사 작용이나 장기의 활동, 원초적인 욕구 등을 관장하니까요.
그러니 상기한 '짐승과 같은 존재'의 뇌와 크게 다를 바 없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냉소, 회의주의적 환멸 같은 것들에 대해,
그다지 공감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한 꺼풀에,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한 꺼풀엔 태양계 바깥으로 뻗어가는 광활한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한 꺼풀엔 고작 담배 한 갑을 두고도 살인을 인내해야만 하는,
그런 비루하고 협소한 관념 체계가 담겨 있습니다.
그 한 꺼풀에서 우리는 국가라는 이념적 구상을 생각하고, 믿고,
그곳에서 지구 안의 다른 나라와 외국인,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가닿습니다.
또 오늘에 매몰되지 않고 내일을 기대하며, 지나간 어제를 추억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의 한 꺼풀에선 양자역학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의 한 꺼풀에는 타인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어떤 우열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저는 차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작 그 얇디얇은 한 꺼풀에, 끝없이 다양하게 나열될 수 있는
인간성의 스펙트럼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 한 꺼풀에 우리의 모든 도덕, 학문, 인간성이 담겨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사회, 세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여느 사람과 다르게, 그 사실로부터 환멸이나 회의가 아니라
어떤 경이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한 꺼풀은 경우에 따라, 우주의 크기에 비견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한 꺼풀 벗기면 다 똑같다는 말은 딱 절반만 옳습니다.
우리는 그 한 꺼풀을 벗겨냄으로써 모두가 공평하게 짐승으로 격하될 수 있지만,
그 한 꺼풀은 '고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거대한 세계의 인식적 근원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지요.
다사다난했던 2024년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해도 많은 비극과 사건들이, 그리고 아마 이런 짤막한 용어들로
요약해선 안 될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이런저런 사건과 그것에 대한 감상이 아니라,
말하자면, 삶이란 참 기묘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삶이란 참 기묘한 것입니다.
사실 제가 2024년 12월 30일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 또한,
제 입장에선 대단히 기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저는 이 [기념일에 대한 소고]를
매년 12월 30일에 이렇게 써나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념일에 대한 소고]를 처음 쓴 2021년 12월 30일의 다음 날에,
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리즈의 시작은 저의 기나긴 유언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글의 넘버링에 집착하는 저이지만,
2021년에 쓴 [기념일에 대한 소고]에는
시리즈의 첫 편을 의미하는 1이라는 숫자를 붙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땐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글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는 그날의, 그러한 죽음의 계획을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딱 그 해에, 그날에 죽는 것이
제 인생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를 완결 짓기에 더없이 적절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 브런치 글의 많은 비중이 2021년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저는 생물학적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그 해 브런치에 쓴 글 전체가
하나의 기나긴 유언장의 목록이며,
[기념일에 대한 소고]는 그 마침표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또한 기묘한 계기로 2021년 12월 31일에 저는 영원한 안식을 맞이할 수 없었고,
이렇게 삶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저는 과거의 죽음에 대한 욕망, 계기 같은 것들을
완전하게 극복하진 못한 상태입니다.
지난 3년간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어쩌면 과거에 비해 더 나아졌을진 모르지만,
고작 3년의 세월로 그 모든 것들을 매듭짓기엔
너무 오랫동안 죽음의 강박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제 인생의 연대기를 연표로 작성했을 때,
2021년 12월 31일을 의미하는 한 점은
제 삶 전체를 조망할 때도 눈에 확 띄는, 거대한 분기점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저는 지금의 제 삶을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출생 연도를 따지기보다는요.
그러나 어쨌든 저는 그날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기로 했고,
또 이렇게, 아직까진 삶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매년 12월 30일에 이 시리즈를 쓰기 시작한 것도,
오래되어 마음에 인이 박힌 그 죽음의 강박에서 기인한 관성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 군인처럼,
물론 저는 그처럼 치열한 생애를 살고 있진 않지만,
매년 새로운 유언장을 갈아 치우고 있는 셈입니다.
다음 해에 더 잘 살 수 있도록,
혹여 죽게 되어도 그다지 아쉽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누구 하나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이 12월 30일이
저에겐 하나의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모든 기념일에 대한 반감과 냉소, 그리고 한 줌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제가,
이제는 하다못해 저만의 기념일을 제정해 챙기게 된 꼴입니다.
우스운 일이지요.
하지만 기묘하면서, 또 아마도 좋은 일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저는 그 전의 363일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날을 기다리며, 저는 생을 연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시, 삶은 기묘한 것입니다.
아마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기념일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생일이나 기일은 말할 것도 없고,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을 기록하는 분기로써의 날짜들도 있을 겁니다.
매년 12월 30일은 이제 저에게 그런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짜가 제 생의 부표이면서 동시에 얇디얇은 한 꺼풀에 새겨진,
저의 인간성을 보증해주고 있습니다.
문득 세계의 정세가 기이하게 느껴집니다.
미래를 낙관하던 10년 전, 20년 전의 사람들이 작금의 세계를 보며
그들이 기대했던 세상인지에 대해 올바로 시인할지 의문스러울 정도입니다.
진취적 발전이라는 개념에 한층 더 의문이 누적될만한 시기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렇듯,
어쨌든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죽기 바로 직전까지도요.
따라서 그러한 처지에 놓인 모든 분들께,
아마도 이러한 형태의 제 첫 독려는 자칫 기만적인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달라진 마음으로,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