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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터리 Sep 06. 2024

천재성, 그 넘지 못할 벽에 대해서

다큐를 지키고자 하는 한 명의 제작자 이야기


이번만큼 글을 쓰기기 힘들었던 적이 없다. 이 기록은 내 열등감의 기록이자 보고 싶지 않았던 나의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장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가 한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겉으로는 평범했다. 하지만 일을 할 때는 남달랐다. 팀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해내야 할지 알고 정확히 해내는 친구였다. 생각하는 것 또한 남달랐다. 내가 9개월에 걸쳐서 이해해야 했던 내용을 단 두 달 만에 흡수했고, 생각지도 못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팀의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그 친구는 말로만 들었던 천재였던 거다.



처음에는 그 친구의 천재성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득바득 애를 썼다. 그 친구가 하는 업무를 모조리 다 보고 그의 장점을 찾아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새벽 1시까지 업무를 했던 적도 있다. 절대적인 시간을 늘리면 그래도 그 친구 이상만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욕심이 과했던 탓일까.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팀의 내부에서 원하는 것 결과물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더니, 회의 시간에 그리 좋은 소리를 못 들었다. 시야가 좁았던 당시의 나는 팀에서 원하는 결과물을 내가 가지고 왔다는 것을 또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내 열심을 잘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억울했던 것 같다.



회의가 끝나고 직속 상사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이길 생각하지 말고, 배워. 네가 그 친구보다 객관적으로 실력 차이가 나." "저 친구는 내가 30년 경력 안에 본 친구 중에서 가장 탁월해"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아직도 이해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있던 열등감이 또는 질투가 누군가의 말로 확인 사살 당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에 어떤 말을 하든 간에 들리지 않았다. 팀에 내가 필요 없는 존재 같았다. 처음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처음으로 주연의 자리가 아닌 조연의 자리에 섰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발견한 이정은 배우님의 말이 나를 다시 일어나게 했다.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 중에는 낭비되는 역할은 없다고 봐요. 그 명제 아래 창의성을 발견하고 개발해야 하는 게 조연이 할 일이고요. 무명의 역할이 있었음에도 무명의 존재가 제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 그래서 재밌는 것 같아요”. “성실과 열심이야말로 운의 기본값이니까 그런 사람을 주의 깊게 보죠.” 이 말을 듣고 생각했다. 조연도 역할이 있는 것이다. 


내가 주연은 아니더라도 내가 내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그 우연히 본 말을 믿고, 나는 희망을 얻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그 희망은 다시 사라지게 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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