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물놀이장
무더운 여름철이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물놀이장이 개장한다. 7월 말경에 문을 열어서 8월 말에 문을 닫는다. 관에서 운영하다 보니 월요일마다 쉬고, 어쩌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쉬는 것 말고는 늘 9시에서 18시까지 열려있다. 동네 놀이터가 여름 동안만 물놀이장이 되는 거라 입장료는 없다. 정시부터 45분 동안 물을 틀어주고 15분은 휴식시간이다. 안전요원들이 수질 검사를 하고 부유물을 건저 내는 그 시간 동안 물놀이 하던 사람들은 잠시 배를 채우거나 쉰다.
올해도 어김없이 물놀이장이 열렸다. 미국에 사는 처제의 아이들 4명이 올해 여름을 같이 보내고 있었기에 처남네 아이들에 우리 아이들까지 8명의 아이들이 첫날 가서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주마다 한번 꼴로 물놀이를 하였다. 그렇게 지내던 중 물놀이장을 닫을 때가 다가왔다.
주말에 시간을 조정하여 아이들과 마지막 물놀이를 가기로 했다.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물놀이장이지만 아이들과 시간을 맞춰 가기란 쉽지 않았다. 여름이 컨설팅 업무의 피크시기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어린이집과 학원을 다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시간을 보니 첫째가 한자시험을 치고 14시 40분에 시험장을 나와서 물놀이장으로 바로 오고, 내가 일을 마치고 본가에 맡겨둔 둘째를 데리고 오면 시간이 맞았다. 미국 아이들은 며칠 전에 본국으로 돌아갔기에 처남네도 같이 놀자고 불렀다. 그쪽 둘째가 아파서 처남댁이 집에서 돌보고 처남이 첫째만 데리고 왔다. 이렇게 올해 마지막이 될 동네 물놀이는 우리 애들 둘과 처남네 애 한 명이 참여했다.
오후 4시가 되어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물벼락을 맞으러 뛰어 들어갔다. 우리 첫째와 처남네 첫째는 둘 다 남자아이로 나이는 네 살이 차이가 나는데 둘이 잘 어울렸다. 6살짜리가 초등학교 3학년 형아와 찰싹 붙어서 따라다니니까 부모의 입장에서는 편했다. 그런데 물놀이장이 파할 시간이 다 되어 가서 그런지 노는 아이들이 많이 없었다. 자기들끼리만 놀기가 재미없는지 엉덩이를 잠시 붙이기 무섭게 아이들은 자기들을 잡으라고 성화였다. 처남이 일어섰다. 같이 온 장인어른과 나는 낚시의자를 펴고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아내는 둘째와 놀았다. 둘째는 물놀이장에 와도 꼭 혼자 놀았다. 누가 자기 옆에 따라오는 것은 마다하지 않지만 자신이 누구를 따라가는 일은 없었다. 여기저기를 누비며 물줄기를 맞고 미끄럼을 타고 장난을 치면 아빠는 멀리서 지켜만 보았지만 엄마의 마음은 달랐다.
그렇게 한 타임이 지나고 휴식시간이 되었다. 둘째와 놀던 아내도, 아이들과 놀던 처남도 다 같이 돗자리에 앉아서 싸 온 과일을 먹었다. 아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우리 옆 자리에 앉은 가족 얘기가 나왔다. 엄마가 3남매를 데리고 나온 가족인데 그중 둘째가 낯이 익다는 것이었다.
"신랑, 저 여자아이 백OO 아니야?"
"안 그래도 생김새가 어디서 많이 봤다고 했는데, 그렇네 백OO 맞겠네."
본인의 확인이 필요했지만 첫째가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4년 동안이나 같은 반을 했던 백OO가 틀림없었다. 못 본 3년 사이에 키가 훌쩍 커서 단번에 못 알아봤던 것이었다.
5시가 되었다. 물줄기가 다시 쏟아지자 아이들은 다시 처남을 끌고 물놀이장으로 들어갔다. 아내도 물놀이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둘째를 보러 나갔다. 옆 자리의 아이들과 엄마도 물놀이장으로 들어갔는데 가장 맏이인 남자아이 혼자 휴대폰을 보면서 앉아있었다.
"어이, 친구야!"
"네?"
"하나만 물어보자. 네 동생 이름이 혹시 백OO 아니니?"
"맞아요."
"그래~ 우리 애랑 같은 어린이집 다닌 백OO 아닌가 해서 물어봤는데 맞네."
"..."
"너는 몇 학년이니?"
"초등학교 6학년이요."
"그럼 동생하고 세 살 차이구나. 백OO가 오빠가 있는지는 몰랐는데. 듬직하다야!"
"..."
백OO의 오빠는 물어보는 것은 다 대답해 주었고 굳이 할 말이 없을 때는 미소를 보였다.
이제 여자애가 백OO라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 굳이 그걸 확인한 이유는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둘이 짝이 되어 활동을 많이 하기도 하였고 우리 아이가 백OO의 이름을 말하면 부끄러워했었기 때문이었다. 으레 그맘때 부모들이 그렇듯 우리도 아이들끼리 엮으며 놀리기도 하였다.
"나중에 백OO랑 결혼하면 되겠네!"
"아니~ 안 좋아한다고~!"
아이는 펄쩍 뛰면서 부인하였지만 어린이집을 다니는 동안 우리 부부는 첫째를 많이 놀렸다.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각각 다른 초등학교로 흩어졌지만 동네에 중학교는 하나밖에 없어서 이사를 가지 않는 한 중학교에서 만날 사이였다. 그런 둘이 우연히 동네 물놀이장에서 만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마지막 물벼락이 떨어지고 물놀이장 운영시간이 종료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물이 빠지는 시간도 아쉬워 놀고 있는데 옆 자리 아이들은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마침 아이들 엄마도 있길래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백OO 엄마시죠. **어린이집 같이 다녔던 최OO이 아빠입니다."
"아 네~"
"백OO야. 너 최OO이 아니?"
"아니요. 모르겠는데요."
"그래, 모를 수도 있지 나중에 앨범 보면 기억날 수도 있을 거야!"
4년을 함께 어린이집을 다녔고 졸업한 지 3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백OO는 우리 첫째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모를 인간관계의 허망함이 느껴졌다.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해도 1도 지장이 없는 관계이지만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백OO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바람결에 날아가버렸다.
"자! 여기 귤 하나씩 먹어."
남은 과일 중에 귤이 보여서 초6 오빠, 백OO, 백OO의 동생에게 하나씩 쥐어 주었다.
"엄마, 저 아저씨가 이 귤을 왜 주는 거야?"
"네 친구 최OO이 아빠야. OO이 기억 안 나?"
"전혀 기억이 안 나."
백OO네 가족이 떠났고 물이 빠질 동안 장난을 치고 있던 우리 아이들도 돌아와 샤워를 마쳤다. 아이들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이 엄마와 나는 서로 멋쩍게 웃었다. 집에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첫째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백OO를 가지고 널 놀리지 않을게. 아빠 엄마가 그동안 둘이 엮어서 미안해!"
첫째의 머릿속에선 옛날부터 없던 백OO가 부모의 머릿속에는 여태 남아있었던 것이었다. 이번 물놀이장에서의 일로 인해 우리의 머릿속에서도 그녀를 떠나보내었다.
'잘 가 추억의 백OO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