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 그거 적응하는 데 3년 걸리더라. 3년 지나니까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서 지내도 편안해.”
퇴직 후의 첫 삼 년이 갔다.
퇴직 후의 생활에도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퇴직 첫 해.
이때는 뭐랄까, 출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과 설풋한 죄책감에 종종 빠져들곤 했던 것 같다. 남은 긴 세월을 무엇을 하며 지낼까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곳저곳 한달살이 여행을 다니려던 계획은 코로나19로 다 틀어져버렸다. 그나마 여행객 없이 한적한 4월의 제주도 한달살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브런치에 지난 여행 이야기 같은 것들을 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날 무렵 작은 밭이 있는 작은 집 하나를 사서 빈 시간을 보내는 공간으로 삼기로 마음을 먹었다.
처음에는 산과 물이 있는 예쁜 전원주택의 로망을 가지고 집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다 살짝 현타가 왔는데, 퇴직금을 포함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세컨드하우스를 장만하는 데 쓰는 일이 어쩐지 어리석은 것 같이 여겨져서 대출을 받으려고 마음먹고 있던 때에 갑자기 까다로워진 부동산 담보대출 조건과 제약으로 인해 대출을 받기가 어려워진 까닭이었다.
퇴직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퇴직하기 직전에 아들과 딸에게 너희들도 엄마가 직장을 다니는 동안 고생을 했으니 내 퇴직금을 셋이서 나누자고 제안을 했었다. 아이들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거절을 했으나 나는 퇴직금을 받은 즉시 각각 아이들의 통장에 그것의 3분의 1씩을 입금해 주었다. 지인들은 제법 많은 금액을 나누는 줄 알고 왜 그러느냐 만류했지만, 연금을 제외한 내 퇴직 일시금은 그다지 많은 금액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할지 대학원 진학을 할지 고민 중인 아이들이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다면 딱 학비로 쓸 수 있는 금액이었으니, 나는 은근슬쩍 나와 같이 직장생활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의 노고를 위로해 주는 척하며 이후의 진로에 대해 손을 떼겠으니 너희들도 알아서 살아야 한다는 고단수의 신호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편으로는 나이가 들수록 병원과 시장이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내 엄마와 아버지를 보면서 알게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자동차 운전 면허증을 반납하는 것을 보며 나도 차차 운전을 하기 힘들어지는 나이를 향해 가고 있다는 자각도 들기 시작했으니 도시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할 것 같았고 또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는 엄마가 퇴원을 하시면 함께 지낼 생각도 하고 있었으므로 집 관리에 큰 손이 필요하지 않고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 없는 작은 밭이 딸려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병원과 마트를 도보로 이용할 수 있는 밭이 딸린 주택을 대출을 받지 않고 구입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접으려던 중 만나게 된 곳이 바로 여기다.
산을 깎아 개발한 전원주택단지의 제일 작은 집.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았으나 이 집에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께서 집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계약을 진행했기 때문에 아마도 집에 큰 하자가 있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집 뒤에 거의 붙어있는 낮은 산자락에서 흘러내리는 흙이 해빙기와 장마철에 한가득하니 마당을 덮고, 지붕에서 빗물이 모여 떨어지는 우수관이 있는 쪽의 지반이 침하되어 집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부등침하 상태라는 것은 잔금을 다 치르고 이삿짐을 옮기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당연히 불쾌하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혼자 이 집에서 지내시던 어르신께서 기울어진 집이 과연 팔리기나 할까 노심초사하셨을 테고, 팔고 난 다음에는 행여 하자 있는 집을 팔았다고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들어오지 않을까 또 노심초사하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당황스러움보다 더 컸다.
열 평 정도의 목구조 단층집. 방 하나 욕실 하나의 작은 단층집은 생각보다 견고해서 내가 운전을 하며 다닐 수 있을 몇 년 정도의 시간은 견뎌줄 듯 하지만 행여 집이 다 기울어서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면 그냥 죄다 거두어내고 빈 땅으로 만들어버리면 될 거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차 한 대 값도 안 되는 가격의 집인데, 십 년이 지나게 되면 차는 폐차를 하게 될 테지만 여기는 그나마 작은 땅은 남게 될 거라고. 그러니 이 집은 좋은 차 대신 구입한 십 년짜리 놀이터라고 나는 종종 지인들에게 말하곤 한다.
본인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작은 집은 사지 않을 거라고... 마침 사고 싶은 땅이 있는데 돈이 부족하니 좀 빌려줄 수 있느냐는 농담같은 부탁도 받았다. 거짓말같지만여전히 친하게지내고 있는 친구다.
퇴직 둘째 해.
이때는 혼자 생활하시는 아버지와 병원을 나오시는 일이 불가능해진 엄마를 더 자주 찾아뵙고, 빨래나 청소나 음식 만들기 같은 살림살이를 차근차근해 볼까 하는 다짐 같은 것도 있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삼 년 시간이 지난 지금, 요리 재료를 사는 것보다 좀 더 맛있는 밀키트를 검색하는 일에 능숙하다는 건 여전히 음식 만드는 일이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고백이다. 훌륭한 배달 시스템은 장 보러 나가는 일도 별로 하지 않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으니 삼 년이 지난 지금 내게 필요해지기 시작한 건 한 사이즈가 커진 옷들 뿐이다. 삼 년 전에 입던 옷들을 펼쳐보면 쓴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나이 들어서 살이 빠지는 게 오히려 안 좋은 거라고 했어!’ 하는 혼잣말로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퇴직교사 골프모임에도 나가보았다. 골프를 심각하게 못 치기도 하지만 모임 자체에 별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삼십 년을 제한된 사람들만 만나는 환경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폭이 넓어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곳 중의 하나로 골프 모임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직장인과 경영인 모임, 주부들 모임에서 골프 동반을 할 때 각각 다른 분위기의 낯섦을 머릿속에 입력해 가면서 라운딩을 하다보면 골프장에서 매번 여러 유형의 사람들 라운딩을 거들어주는 캐디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떤 일을 심각하게 잘하지 못하는 핸디캡 상태일 때 만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담긴것이어떤 색깔을 담고있는지 단박에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시간들을 보냈다고나 할까.
골프 동반을 함께 하기 힘든 수준의 이상한 스윙을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나에게 보내는 어떤 시선과 미소 속에는 그들의 성품이 들어있었다.
폭이 넓거나 아니면 열등감이 많거나.
사람들의 첫 시선에서 그의 성품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이 되는 시간이 지나기까지 내 스윙이 달라지지 않았으니 그만두어야 했지만 어쨌거나 그닥 재미는 없게 보낸 시간이었다.
산고양이 밥을 챙겨주고, 병원에 계신 엄마에 대해서는 걱정만 하고. 아버지와 종종 시골집에 내려와 시간을 보내고 딸아이와 이곳저곳 카페 투어를 하기도 하고 가끔 친구들을 만나고, 정년퇴직한 남편과 여행을 다니고....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난 혼자 지내는 집콕스타일이라는 것을. 하루종일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살림이 아닌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거의 싫증 내지 않아 하며 지낼 사람이라는 것을.
시골집 마당에서 풀멍, 하늘멍 하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을 매우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셋째 해가 되어갈 때 비로소 시간강사를 구하느라 애를 쓰는 중간관리자인 친구와 지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분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아직 내게 남은 약간의 힘을 현장에 보탬이 되도록 써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기간제교사와 시간강사를 했다. 그러나 약속된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늘 ‘참 잘 그만두었다. 나, 그동안 정말 고생 많이 했었네. 이제 빚 갚는 일은 다 한 것 같으니 시간강사도 그만해야 되겠다’는 확인만 거듭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마지막이라 여겼던 학교의 계약기간이 끝날 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이제 학교에서는 그만 봅시다. 건강하게 재미있게 잘 지내시고 밖에서 만나 밥이나 먹어요~”
하는 작별 인사를 남기고 왔다.
퇴직 후 4년 차.
이제 정말 자유롭게 자유로울 수 있기로 한다.
여담.
브런치에 첫 글을 올릴 때 라이킷을 눌러주는 분들이 놀랍고도 감사했다.
구독자가 생기고, 나 또한 그분들을 구독하며 글을 읽고 라이킷을 누르고 하는 중 구독자 수가 조금씩 늘어가는 기쁨도 있었다. 그러다 하나의 계기로 멈춤을 했다. 나름 성의 있게 서로 구독을 하며 일상을 나누던 한 작가에게 돌연 구독취소를 받는 일이 있었다. 의아했으나 나름의 사정이 있으려니 하고 지내는 중에 그것이 SNS 팔로워 수를 늘리는 기법 중 하나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나의 팔로워 수를 늘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팔로우하다 보면 마침내 나에게도 내가 목표로 하던 숫자의 팔로워가 채워지는 날이 온다고 했다. 그때 자신이 했던 모든 팔로잉을 취소하는 기법.
왜?
굳이 취소를?
'그래야 있어 보이니까... '가 답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 작가분도 그런 기법을 쓰셨던 것 같았다. 확실히 그분의 글에 드디어 구독자 수가 몇 명이 되었다는 글이 있었던 걸 보고 난 다음에 생긴 일이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느낀 건 당황스러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글을 쓰는 일에서도 자유롭고 싶어졌다. 더. 더. 더.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후 글 하나가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던 날 밀려들어오는 방문객 숫자에 머릿속이 하얘졌던 기억이 여전하다.
다음에 또 같은 일이 생겼을 때, 의아했다.
이 알고리즘이 나에게서 꺼내려고 하는 것은 예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차차 들었다.
아니,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음.... 알고리즘은 예쁘지만 거기에 부응시킬 수 있는 나의 내면이 예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식물을 기르는 일상을 올리면 돈을 주는 한 대기업의 글쓰기 플랫폼에 단지 식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올린 글이 선택을 받아서 몇 차례의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재미있었지만 그것도어쩐지 젊은 사람들의 사탕을 빼앗아먹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멈추고 있다.
이런 마음의 막힘에 대해서도 자유로워져야 하는 일이 다음 과제일 것 같다.
그게 자유롭다거나 자유롭지 않다거나, 당황스럽거나 기쁜 일이 아니라 그냥 매번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는 것처럼,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바람이 부는 것처럼, 길이 있고 길을 가는 것처럼 그런 그런 일상을 보내는 거니까 마음에 새김 같은 것도 더는 없어도 된다는 그 자유함을 이제는 찾아가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