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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Oct 22. 2023

물이 들 때를 놓치지 말 것

어느 해 여름, 이국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해변에서 남편과 추피는 모래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짐을 도맡아 멀찍이 떨어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짐을 두고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문득 발 밑을 내려다보니 축축한 모래가 느껴졌다.


'꽤 멀어 보이는데, 바닷물이 여기까지 들어오기도 하나 보네.'


혹여 거센 파도가 여기까지 밀려와 짐이 홀딱 젖을세라 괜히 조바심이 났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다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거리상 여기까지 파도가 밀려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비라도 왔던 걸까.


추피와 남편이 쌓던 모래성은 꽤 견고해 보였다. 단단한 벽을 우뚝 세운 모습이 멀리서 봐도 그럴싸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파도가 점점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바닷물이 모래성을 침범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때마다 모래성은 와르르 무너지고 무너졌지만, 남편과 추피는 다음 물결이 덮치기 전에 재빠르게 보수를 마쳤다.


더 빨라진 주기로 더 센 물살이 들이쳤다. 이제는 무너진 벽을 다시 쌓아 올리기도 전에 다음 파도가 밀려왔다. 남편과 추피는 당황하는 표정이다.


"뭐야 왜 이래. 빨리 다시 쌓자!"


둘은 의기투합해서 위기를 이겨낼 모양이다. 그걸 지켜보는 나는 그 모습이 마냥 우습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 이거 좀 이상한데, 싶었다. 둘이 모래성을 쌓고 있던 자리가 점점 물에 잠겨가는 게 보였다. 처음 자리 잡을 때만 해도 저렇게 첨벙 거리며 걸어 다닐 정도는 아니었는데. 모래를 끌어모으려 동동 거리며 뛰어다니는 추피의 발이 물에 잠겨서는 발걸음마다 철썩 소리를 냈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먼바다 쪽을 바라보니 해안가 이만치까지 차지해 버린 바닷물의 면적. 바다보다 내가 발 딛고 선 모래밭의 넓이가 더 좁아져 있었다. 어느새 내 발가락 사이로도 물이 찰랑찰랑 들기 시작했다.



어릴 적 뉴스에서 조개 따위를 잡다가 물이 들어오는 것을 미처 눈치 못 채 목숨을 잃은 사건들이 종종 흘러나오곤 했었다. 물이 들이 차는 걸 왜 몰라, 말도 안 된다며 어린 마음에 어리둥절해했던 기억이 있다. 역시 뭐든 내가 겪어보기 전엔 미지의 세계다. 뭐든 나 따위가 함부로 재단할 일이 아닌 것이다. 

 

빠르게 늘어난 물에 셋이 허겁지겁 육지로 올라섰던 이날의 일은 내 마음에 파동을 일으켰다. 자연이 주는 가르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낯간지럽다. 다만 그날 나는 내 발등 위로 잘박 잘박 차오른 바닷물을 헤집고 빠져나오며 불현듯 영희씨를 떠올렸다. 해변에 차오르는 밀물의 물결이 마치 영희씨가 나에게 던진 무례한 말 한마디, 한마디 같았다. 발 딛고 서있는 내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스멀스멀 주변을 잠식하며 나를 가두는 말들. 한 두 번 찰랑일 때 멀뚱히 서있다 보면 그 사이에 나를 또 침범하는 물결.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와르르 나를 무너지게 하던 그녀의 말, 말, 그리고 그 눈빛들. 처음 물이 들이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얼른 고개를 들어 먼바다를 바라봤어야 했다. 그리고 기민하게 빠져나왔어야 했다. 내게 들이치는 저 물결이 나를 결국 옥죄일 것임을. 어? 이거 이상한데, 하는 순간엔 이미 늦었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인 줄 안다는 현대 사회의 격언은 고부 관계에서도 유효했다. 한 번, 두 번 침범하는 물살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물가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고 아둔하게 서있다가 결국 가라앉고 말았다. 만조와 같은 관계의 파국을 맞이한 것. 그 들이치는 물살 속에서 허우적대며 숨을 거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테다.


날이 저물고 밤산책에 나섰다. 이어진 산책길을 따라 해변 쪽으로 들어서니 역시나 모래성을 쌓던 발 디뎠던 곳은 온데간데없었다. 파도가 산책길 바로 앞까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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